절판된 첫시집 <저 석양>에서 24편, 그 뒤 쓴 27편을 고쳐 다듬고 한데 묶어 세상에 내보낸다. 못 만나뵀지만 박용래, 김관식은 시와 삶의 스승이다. 두 분은 자기 몫의 시와 가난을 앞서 살아냈다. 피해가지만 않는다면 가난은 시의 큰 밑천임을 배웠다. 시로 돌이켜보면 다 아름답다.
내 여름날 같이 땀흘리고 다투고 껄껄대던 사내들이여, 고맙다.
표제시 서넛 말고는 대부분 십 년 저쪽 시들이다.
이렇게 오래 묶이기까지 참 오래 기다려 주었다.
꽃밭에서 넘어진 아이가 무릎의 피를 한참 울다 다시 보니 붉은 꽃잎이더라는, 일곱 살 여름에 만난 그 간결한 문장에 의지해 삶도 시도 여기까지 왔다. 밀어 주고 이끌어 준 이들에게 감사 드린다. 어김없이, 어깨의 짐을 내려 주던 붉은 저녁 해에 대한 경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시 쓰길 잘했다는 느낌이 든다. 잠들기 전, 짧게 입가를 맴돌다 가는 이 낯선 손님에 대해서도 꼭 적어 두고 싶다.
이담에 뭐가 되고 싶냐는 물음에 우물쭈물하던 기억 까마득하고 이젠 아이들 몸짓에 저절로 즐거워지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고맙다.
입때껏 못 지킨 약속이 어디 헤아려지기나 하랴만 술 좋아하시던, 가족을 위해 한껏 자제하시던 젊은날의 아버지 무릎 위에서 했던, 방 안에 수도꼭지를 달고 그걸 열면 술이 콸콸 쏟아져나오게 하겠다던 바로 그 약속 하나는 가끔 푸른 하늘 속 외로운 깃대처럼 흔들린다. 그 하늘 깊어지면 길 가다가 고개 젖혀 거기 까마득한 기러기 행렬을 보겠다. 귀 한껏 열고 희미한 울음소리도 듣겠다.
일찍 자연학교 학생이 되었다. 생각하기보다 느끼기에 더 적당한 짐승으로서 고백하지만 나는 몸을 살았으므로 행복했다. 숲을 걷는 동안 자주 부추겨지는 그 느낌은 도시 한가운데, 사람들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고맙다.
2001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