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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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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시절과 형식>

변장한 유토피아

창살에 갇힌 동물들의 처지는 정확하게 문학이 이즈음 처한 처지와 일치한다. 문학 또한 변장한 유토피아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창살 안에 갇힌, 그러나 갇혀서도 여전히 자본주의와는 상관없는 어떤 상태를 지시하고자 온갖 애를 다 쓰는 유토피아, 그것이 내겐 문학이다.

평론가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첫째로, 한 도시에서 오래 살았다는 것이 저절로 그 도시를 잘 안다는 사실의 보증은 되지 않는다는 걸 K는 인정해야 했다. 종종 술자리의 화제가 되기도 하는 그의 길치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법 유명하다. 그가 내비게이션 없이 찾아갈 수 있는 장소는 집과 학교와 자주 들르는 서울의 모 출판사 정도가 다다. 광주에는 길에 관한 한 모험심이 전혀 없는 그가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았고, 여러 장소들의 역사와 그 안에 묻혀 있는 사연들에 대해서라면 그는 더욱더 아는 것이 없었다. 타고나지 못한 공간 인지능력은 그렇다 치고, 우선 그는 정말 자신이 광주를 사랑하는지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문단의 이러저러한 일로 서울행이 잦은 그는(그의 마음 또한 오래전부터 서울행이 잦았다. 한국 문학은 주로 서울에 계시기 때문이다) 평소 스스로의 정체성을 다소 냉소적으로‘탈식민주의적’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말하자면 K는 스스로를 ‘하인숙씨 닮은 자’라 생각해오던 터다.「 무진기행」의 그 유명한 여교사 하인숙 말이다. 상경하지 못해 조바심치면서도 속물들의 술자리에서는 <목포의 눈물>을 부르던 그녀의 노래는 참으로 이상한 양식의 노래였는데, K는 자신의 글이 어쩌면 그런 양식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목포의 눈물>은 목포를 사랑하는 사람이 불러야 제맛이 나는 법이다. 글을 쓰려고 작정하자 K는 뭐랄까, 프란츠 파농의 비유를 빌리자면 자신이 등단 후 15년간‘ 광주 피부’에‘ 서울 가면’을눌러쓰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싶은 자의식에 시달리곤 했다. 진지하게 고쳐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광주에 대해 쓸 자격이 있는지 자신이 없어졌던 것이다. 이 책에서 그가 일인칭‘나’가 아니라 삼인칭‘ K’로 등장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다. 독자들에게 전하거니와 그는 이 책을 광주라는 도시에 대해 말할 온전한 자격을 갖춘 이가 쓴 것으로 읽지는 말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다만 한발치 떨어진 곳에서 걸어본 광주의 모습이 주는 어떤 미덕 같은 것은 기대해도 좋으리라. 둘째로, K는 자신이 광주 전체를 다 걸어볼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여야 했다. 이 책의 성격이 광주 여행 안내서 따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령 여행 안내서라면 이 도시를 찾는 많은 외지인들의 먹을 곳, 마실 곳, 놀 곳, 잘 곳이 즐비한 상무지구 신도심에 대해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K는 그곳에 대해 별로 할말이 없다. 수많은 모텔과 유흥업소들이 불야성을 이루는 곳, 그러면서도 한편에 5·18기념공원과 자유공원, 김대중컨벤션센터와 거대한 아파트 단지들이 마치 무슨 3차원 콜라주 기법을 실험하듯 나란히 들어서 있는 그 지역을 그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도 나이가 든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그는 무등산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다. 전 국민의 유니폼이 되어버린 고급 등산복을 입은 중년들의 산행에 그는 아직 동참할 마음이 없다. 그는 들어가는 나이를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거다. 게다가 K는 어딘가 오르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결국 이 책에 기록된 K의 걸음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셈이다. 그는 주로 그가 나고 자란 곳, 겪은 곳, 그래서 그의 삶에 흔적을 남긴 곳 위주로 걸었고, 그러면서도 요행이나마 그 걸음이 어떤 보편성 같은 걸 얻을 수 있기를, 그 걸음이 혼자 걷는 걸음만은 아니기를 바랐다. 말하자면 아주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걸음이 되기를 그는 기대하고 있다. 셋째로, 그가 걸으면서 찍은 사진과 들은 음악들도 인쇄용으로는 별 쓸모가 없었다. 처음에 K가 그려보았던, 절묘한 음악과 아우라로 가득한 사진과 고독한 사내의 뒷모습 같은 것은 실로 유치한 상상이었음을 그는 금세 깨달았다. 공공의 독자들에게 인쇄된 상태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자, K는 자신이 찍은 사진들의 실체와 대면해야 했다. 사진에 관한 한 그는 나르시시스트였던 것이다. 자신의 이미지에 매혹당했다는 의미에서…… 게다가 그가 오랜만에 곰곰 걸은 광주의 거리들은 그에게 감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역시 염세주의자였다. 그래서 그의 카메라에는 매번 낡고 바래가는 것들, 허황되고 못마땅한 것들만 주로 잡혔고, 그마저도 구도와 화질이 형편없었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는데, 무엇보다 들을 새가 없었고, 듣자니 소리가 마음과 겉돌았다. 더더군다나 음악은 인쇄할 수도 없었다. 독자들에게는 이 점 미리 감안하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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