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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이름:윤해서

성별:여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직업:소설가

최근작
2023년 12월 <긋닛 6호 : 돌봄사회>

0인칭의 자리

0과 1 사이, 어디쯤 2019년 가을

움푹한

0과 무한대는 같은 것이지? 조카가 물은 뒤로, 나는 이 물음을 계속 물고 있다. 답을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 사라지고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들. 사막개미는 산란된 빛을 통해 집을 찾아간다. 해 질 녘. 저물녘. 동녘. 들녘. 녘은 공간과 시간을 모두 지시한다. 방향과 때는 무관하지 않다. 거북이는 먼 바다를 헤엄치고, 먹은 벼루 위에서 짧아지고, 거북이는 해안으로 돌아오고, 벼루는 조금씩 우묵해지고, 사람들의 발목은 물에 잠기고, 먹물은 벼루에서 넘치고, 모두가 읊고 있다. 벼루 위에 먹을 갈고 있으면 시간이 먹물이 된다. 움푹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당신에게 내가 둘러싸고 있는 당신에게 필요도 아름다움도 아닌 당신에게

코러스크로노스

안녕하세요, 윤해서입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조금 전 언 강을 건너 출근했습니다. 더러 녹지 않은 눈들이 눈에 띕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바닥을 보며 걷습니다. 저는 아주 느리게 걷고 그래서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저를 지나쳐 갑니다. 어떤 사람은 뒤를 돌아보기도 합니다. 걷고는 있는 건지, 멈춰 서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란히 걷는 사람을 답답하게 할 정도로 천천히 걷는 저는 사실 걷기만 느린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느린 편입니다. 말도 느릿느릿하고 밥도 천천히 먹고 마음도 아주 느리게 움직입니다. 거의 모든 순간에 삶이 저를 앞지른다고 생각합니다. 7년 만에 첫 책을 묶습니다. 코러스크로노스. 책의 맨 앞장에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의 이름과 합창을 의미하는 코러스, 두 단어를 나란히 두었습니다. 시간합창.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시간의 합창이 들려옵니다. 코러스크로노스라는 말을 처음 생각했을 때, 그때도 지금처럼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저는 여의도의 한 카페에 앉아 있었고 신나게 어떤 건축물을 지었습니다. 그 건축물은 모든 면이 마름모꼴의 유리와 얼음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서빙고역 앞에 있습니다. 무엇이든 태울 수 있는 곳인데 작은 방마다 색색의 아름다운 불꽃들이 피어오릅니다. 불꽃은 재를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집어삼킵니다. 이곳에서 주인공은 자신도, 자신과 함께 들어왔던 누군가도 잊고 수많은 시간의 합창 속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미지의 어둠, 테 포케레케레 속으로요. 저는 그 건축물에 이름을 지어 붙였습니다. 코러스크로노스. 코러스크로노스는 그렇게 시간이 합창하는 소설 「테 포케레케레」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코러스크로노스』에는 두 개의 「테 포케레케레」가 있습니다. 두 개의 코러스크로노스가 합창의 시작과 끝에 문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처음 「테 포케레케레」를 썼을 때, 미지의 어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시간의 순서를 바꾸었습니다. 미지의 시간 속에 테 포케레케레를 남겨두었습니다. 책을 묶으면서 첫번째 합창을 불러옵니다. 두 개의 변주곡을 코러스크로노스에게 돌려줍니다. 다른 시간대에서 동시에 불리는 미지의 합창이라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느리게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합니다. 여전히 제 귓가에 울리는 합창 소리들. 거기, 수많은, 당신과 제가 있습니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다양한 생물과 언어가 사멸해가는 시대에, 인간이라는 한 종(種)에게서 보존되어야 할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무엇인가요? 저는 그때 이 어려운 질문 앞에서 잠깐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가까스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질문 앞에서 몇몇 단어들을 떠올리다 아득함을 느낍니다. 이런 기억이 있어요. 해가 지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피워놓은 모닥불 앞에 술잔을 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요. 나무가 타닥타닥 타들어갑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섞이고 잔 부딪치는 소리가 커집니다. 어둠이 점점 짙어지고 나무는 까만 재가 됩니다. 제 옆에는 잘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그는 요리사입니다. 가로등 불빛 한 점 없는 새까만 밤. 모닥불은 고요히 잦아들고 알불만 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둘 방으로 돌아가죠. 저는 넋을 놓고 새빨간 알불을 보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보석들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방에는 어둠과 적막뿐이에요. 우리 어머니는 알콜 중독자였어. 그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저는 잘 모르는 사람의 갑작스런 이야기에, 낯선 언어에 잔뜩 긴장합니다. 동생을 공부시키려고 요리를 시작했지. 그는 슬픈 가족사를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잘 모르겠어. 한참을 이야기하던 그가 활짝 웃어 보입니다. 눈가가 젖어 있습니다. 저는 당황합니다. 어쩔 줄을 모르죠. 사실 쩔쩔매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데.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제 짧은 영어는 너무 짧고, 몇 개의 단어들은 혀끝에서 완전히 달아납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도 할 수 없어서. 그에게 들어보라고 말합니다. “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 멀리 뱃고동이 울리면 네가 울어주렴 아무도 모르게. 모두가 잠든 밤에 혼자서. 모두가 잠든 밤에 혼자서.” 그가 무슨 내용의 노래냐고 묻습니다. 저는 또 당황합니다. 인생에 대한 이야기인 거 같아. 가까스로 대답합니다. 알불은 식어가고 밤은 점점 깊어갑니다. 저는 여전히 이 어려운 질문 앞에서 아득함을 느낍니다. 시간의 합창에 귀 기울입니다. 멈춰 선 듯 가만가만 움직입니다.밤은 점점 깊어갑니다. 다만, 시와 소설에 경계가 있다면. 음악과 문학에 경계가 있다면. 삶과 죽음 사이에 경계가 있다면. 그 사이 어디쯤, 그곳에서 세상의 모든 먹먹한 순간들이 한순간이라도 멈추기를 바랍니다. 책을 만들어주신 분들께 읽어주시는 분들께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엄마, 아빠, 사랑하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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