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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이름:한승헌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34년, 대한민국 전라북도 진안 (천칭자리)

사망:2022년

직업:변호사

최근작
2022년 7월 <한승헌 변호사의 유머>

갈망의 노래

◎ 법(法)과 서정(抒情)의 사이 법은 까다롭고 골치 아프고 무섭다는 인식에서 대강은 벗어나기 어렵다. 알고 보면 법이라는 것도 상식과 윤리와 관습에 뿌리를 두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든가 집단생활의 규범 따위를 정의로운 안목에서 판단하는 잣대라고 아무리 강조한들 ‘에비 에비’의 대상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 신세를 지는 것도 싫고, 하물며 법망 속에 갇히는 일은 질색이기 때문에, 평생 동안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은 것이 일단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믿는 이들의 일반적인 관념일 터이다. 물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세상’에서 사노라면 법을 친근한 벗으로 삼지 말라는 ‘법’ 또한 없겠으나, 그것도 ‘글쎄올시다’의 수준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래저래 법은 불가근불가원의 존재면서, 전체적으로는 인연을 맺고 싶지 않은 심정으로 그 언저리마저 피해 다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내력에서겠지만, 법은 또 항상 차고 근엄한 표정을 짓게 마련이어서 근접을 불허하는 속성도 있다. 한승헌은 법이라는 추상적인 개념과 생활인의 거리를, 성큼 좁혀준 대표적인 사람의 하나다. 그의 직업 자체가 변호사인 까닭만은 아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말할진대, 그리고 다분히 경강부회의 느낌은 있되, 그는 생김새부터 법을 배경에 두르고 있는 그쪽 직업인들의 위세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셈이다. 꺼무스름한 얼굴 위의 두 눈은 노상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 입에서는 만나는 사람의 가슴을 더불어 열어주는 푸근한 해학이 뛰어난 유머 감각과 함께 순발력 있게 튀어나와 친화력(親和力)을 보탠다. 눈앞의 누군가가 성에 안 차는 사람일 때, 농담에 가시를 싸서 던지는 촌철살인의 멋 또한 그의 것이다. 한승헌의 한승헌다움을 바로 이 점에서 발견한다. 인권변호사이면서 시인인 한승헌, 시인이면서 수필가인 한승헌은, 법리(法理)를 매섭게 따지되 그 속에 모듬살이의 순수한 서정성을 담기 때문에 그의 변론은 마침내 인간적이다. 남들이 갖추기 힘든 조건을 체질적으로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무주 구천동이 그리 멀지 않은 전라도 첩첩산중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975년에서 80년 봄 사이에 두 번 옥살이를 한 그는 필경 법이 무엇을 위해 있어야 하는가를 양날의 논리로 더욱 키웠을까. 한승헌의 부지런한 저작 활동을 통해 보면 그런 흔적이 두드러진다. 흔히 우리나라 풍토에서는 직업의 ‘결백성’을 요구하는 경향이 짙다. 판사는 판사 일에만 몰두하고 변호사는 변호사 업무 이외의 일에 한눈팔지 말아야 한다는 식이다. 따라서 과학자가 소설가를 겸한다면 그 사회에서는 ‘돌연변이’로 치기 쉽다. 하지만 그와 같은 추세를 굳이 예외시할 것은 아니다. 물리학자가 세계적 철학자일 수도 있으며 문명비평가 노릇을 한대서 이상할 것이 없다. 1990년 3월 서울서 열린 ‘정의·평화·창조질서의 보존 세계대회’(JPIC)에 참석차 내한했던 서독의 물리학자며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박사도 그런 사람이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일본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는 후자의 경우다. 문제는 그 분야에서 거둔 성과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에만 집착하기를 요청하는 것은 다양성이 구가되는 시세(時勢)와도 걸맞지 않다. 더구나 종사하고 있는 일이 글을 통한 표현과 연관됨으로써 양자를 자기 안에서 승화시키는 성질을 띠었다면 한층 다행스럽다. 취미나 여기(餘技) 또는 아마추어의 도락쯤으로 여긴다면 모를까, 낱낱의 분야에서 뚜렷한 존재로 서 있을 때, 그의 빛나는 예지를 부러워했으면 했지 탓할 건 아닌 것이다. 남다른 재주를 지녔으면서 스스로를 절제하기에 힘쓰고 ‘우매한 바보’의 위대성까지 꿰뚫는 안목을 지녔으면 더욱 좋다.

산민객담

때로는 정담이나 방담이 설교나 웅변보다도 정직하고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즐거움과 통쾌함이 동반하는 해학에도 그런 부수적 장점은 따르게 마련이다. 굳어빠진 '차려문화'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마음의 여유와 재미를 누릴 수 있는 '말의 미학'은 그것대로 하나의 절실한 구원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서양식 분류법으로 쳐서 위트나 조크 또는 유머 중 어디에 속하느냐고 따질 필요는 없다. 일상의 삶 속에서 우연히 순간적으로 떠오르고 얻어지는 해학이야말로 우리의 심성과 정서를 윤택하게 해주는 영양제나 보습제가 된다. 조금만 눈여겨본다면, 우리 주변의 세상사나 자신의 체험 그 자체가 곧 해학(적)이 되는 수가 많다. 가벼운 지각(知覺)이나 사유작용(思惟作用)을 통해서 해학(-스러움)을 만날 수도 있고, 재담 수준의 말의 향연을 즐길 수도 있다.

유머수첩

◎ 유머는 우리의 사고와 언어에 전방위적인 앱으로 다가오는 필수품 유머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 해방과 여유, 친화력과 화합, 위로와 즐거움을 안겨주는 묘약이다. 그런가 하면, 비판과 설득, 공격과 도피의 기능도 갖는다. 말하자면 우리 인간의 사고와 언어에 전방위적인 앱(애플리케이션)으로 다가오는 필수품이라 하겠다. 우리 주변을 보면, 사석에서는 모두 농담도 잘 하고 우스개말도 난무한다. 그런데 공생활의 영역으로 장場이 바뀌면 여간해서 유머를 듣기가 어렵다. 물론 우스갯소리가 다 유머는 아니지만, 엄숙일변도의 언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만은 아쉬운 노릇이다. 사적 담론에서 분출되는 유머를 공적인 자리에서도 살려서 활용하는 진화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예컨대 대통령의 형님을 통하면 뭐든지 된다는 ‘만사형兄통’ 같은 국민 해학은 ‘사담의 공담화’에 성공한 걸작 유머의 압권이라 할 것이다. 나는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난 유머를 값지게 여긴다. 신문이나 책에서 읽은 기성품 유머, 누구에게선가 들은 남의 유머는 내 유머적 사고를 위한 참고용일 뿐이다. 체험 유머야말로 나 고유의 밑천이며 수제품처럼 개성 있는 체취가 묻어나서 생방송 같은 긴장도 느끼게 한다. 이 책에서도 물론 체험 유머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조금만 마음을 쓰면 우리 일상 주변에서 주옥같은 유머·해학거리와 만날 수 있다. 유머의 좋은 점은 여러 모로 설명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원가가 별로 들지 않고, 거기에 또 면세라는 이점도 있다. 신분이나 소득과 상관없는 보편적 지적재산인 유머가 널리 일상화되고 체질화되었으면 좋겠다. 독자에게 너무 ‘차려’만 요구하지 말고 더러는 ‘편히 쉬어’의 기회도 마련해 준다는 것, 야구로 말하자면 단조로운 직구의 따분함 대신 여러 변화구를 즐기도록 해드리자는 것, 이런 내 의도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독자가 많았으면 좋겠다.

하얀 목소리

“실은 문학보다는…… 먼저 간 시인들이 생각난다.” 40년 전 《노숙》의 ‘후기’에 적었던 것처럼, “불행하더라도 인간의 길을…,” - 이렇게 다짐하면서 써 온 어설픈 작품들을 통하여 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고단한 생명들에게 손이라도 한 번 더 흔들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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