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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최진석

최근작
2023년 12월 <내가 지은 집에는 내가 살지 않는다>

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감응학을 수립하기 위한 각론적 실천들이라 할 수 있다. 굳이 분과를 따진다면 예술학과 철학, 생명과학과 문학, 문화와 사회비평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분과학문적 글쓰기를 지양하고 혼종과 교차를 통해 다양한 영역들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이를 일종의 감응적 글쓰기라 명명한다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이 가운데는 보다 이론적 논의에 천착하는 글도 있고, 예술이나 과학, 사회적 현상을 통해 감응의 실제적 사례들을 면밀히 고찰하려 한 글도 있다. 어쩌면 감응에 대한 서로 간에 상이한 시각차나 논점의 대립선도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감응이란 느끼고 호응하는 것, 새로운 관계를 구성함으로써 또 다른 관계의 형성을 촉발하는 힘의 운동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 묶인 각각의 글이 차이를 드러내고 또 상호간의 충돌과 변형을 촉진한다면, 이는 그만큼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감응되고 감응하는 관계 속에 있음을 뜻할 것이다. 이 점에서 감응의 사유는 언제나 또 다른 감응을 생산하는 긍정적 능력이라는 애초의 정의로 우리는 돌아갈 수 있다.

불가능성의 인문학

“인문학은 불가능한가? 그렇다. 진작 유효기간이 지난 쿠폰에 미련을 둘 필요가 어디 있는가? 인간적 가치를 위해 인간 밖의 모든 것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인문학, 문화를 창달한답시고 권력의 시종이 된 인문학에 장래를 걸 이유는 없다. 인문학은 가능한가? 진정 그렇다. 인문학을 배반하는 인문학, 휴머니즘이라는 철 지난 깃발을 걷어내고 인간성의 경계 너머로 인간을 돌려보내는 인문학, 문화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짓는 경계선을 지워내는 그로테스크한 표정의 인문학, 실선과 직선의 논리학을 점선과 곡선 그리고 뫼비우스의 비논리로 감응하는 인문학을 통해 우리는 인문학을 넘어서는 인문학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사건의 시학

시를 시로서 경험하게 하는 것은 눈이 아니라 귀로 듣게 하고,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울리게 하는 데 있다. 누군가 타인의 목청을 빌려 말하고 읊조리게 하는 데 있다. 그로써 순전히 듣는다는 데 주의를 기울이고, 소리의 의미를 뒤좇으며 궁구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렇지 않다면 머잖아 시는 낡은 종이에 찍힌 인쇄 자국에 지나지 않고, 급기야 잉크가 휘발되면서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일종의 청력적 사건으로서 시의 감응을 우리는 어떻게 겪어낼 수 있을까? 비평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화된 비평으로서 또 하나의 사건으로 경험되어야 할밖에. 이것이 과연 내게 가능한 몫일까? 평론가의 이력을 소설로 출발했는데, 시에 대한 글쓰기를 먼저 묶어 첫 평론집을 내게 되었다. 인생의 많은 다른 일들이 그러하듯, 이 역시 내가 삶이라는 사건에 열려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라 감히 말해 본다. 하지만 낯선 시를 마주칠 때마다 여전히 설렘과 당혹의 딜레마에 빠지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계속 시에 대해 말하고 글을 쓸 수 있을까? 예기치 않은 모든 것은 늘 두렵고 힘겹게 마련이지만, 사건에 항상 자신을 열어둘 수 있도록 기원한다. 사건의 시학은 그로부터 시학의 사건이 될 것이다. -(<책머리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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