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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이름:이승우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59년, 대한민국 전라남도 장흥 (물고기자리)

직업:소설가

기타:서울신학대학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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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큰글자도서] 목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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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자도서] 목소리들

“슬픔은 탄식과 섞이고 어떤 애도는 종종 자기방어술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문장을, 이 책에 실린 한 소설에 대해 언급하면서 쓴 적이 있습니다. 탄식 아닌 슬픔이 없고, 자기방어 아닌 애도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러니 ‘기억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쓴다는 말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사람은 가련하지만 부끄러운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 생각에서 아주 멀리 가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시인의 고백처럼, 늘 “죽은 사람에게는 돌려주지 못한 것”이 많은 법이니까요. 돌려주지 못한 것만큼이나 ‘들려주지 못한 것’도 많은 법이니까요. 그런데 그 목록들은 그의 죽음 후에 탄생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 에서는 갑자기, 혹은 비로소. 이해받으려는 간절함이 돌려주지 못하거나 들려주지 못한 것들을, 갑자기, 혹은 비로소 태어나게 하는 걸 테지요. 그러니까 아마 쉽지 않은 일이겠으나, 탄식 없이 슬퍼하고 변명 없이 애도하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이해받으려는 간절함’이 아니라 ‘간절함을 이해하는’ 글의 저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23년 가을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문득 그의 몸이 보였다. 그의 몸은 흙투성이였고 상처가 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온몸이 흙이었고 상처였다. 흙과 상처의 육체였다. 육체였으므로 나는 그를 의심할 수 없었고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소설은 세상을 향한 내 가난한 소통의 수단이다. 나는 절필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 담긴 것들은 그저 제가 소설을 써오면서, 그리고 소설 쓰기를 욕망하는 문학청년들을 곁에서 보아오면서 생각날 때마다 한 구절씩 적어나간 사적인 노트입니다. 방법보다 태도를 강조하는 문장이 많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내 자신에게나 주문해야 할 문장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쓰기를 욕망하고 고민하는 적지 않은 '문학에 붙들린 영혼'들과 글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 이야기를 갖게 되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에게 이 작은 노트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큰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목소리들

“슬픔은 탄식과 섞이고 어떤 애도는 종종 자기방어술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문장을, 이 책에 실린 한 소설에 대해 언급하면서 쓴 적이 있습니다. 탄식 아닌 슬픔이 없고, 자기방어 아닌 애도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러니 ‘기억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쓴다는 말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사람은 가련하지만 부끄러운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 생각에서 아주 멀리 가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시인의 고백처럼, 늘 “죽은 사람에게는 돌려주지 못한 것”이 많은 법이니까요. 돌려주지 못한 것만큼이나 ‘들려주지 못한 것’도 많은 법이니까요. 그런데 그 목록들은 그의 죽음 후에 탄생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 에서는 갑자기, 혹은 비로소. 이해받으려는 간절함이 돌려주지 못하거나 들려주지 못한 것들을, 갑자기, 혹은 비로소 태어나게 하는 걸 테지요. 그러니까 아마 쉽지 않은 일이겠으나, 탄식 없이 슬퍼하고 변명 없이 애도하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이해받으려는 간절함’이 아니라 ‘간절함을 이해하는’ 글의 저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23년 가을

생의 이면

이 책은 나의 숨결과 혼이 가장 진하게 베어 있는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난스러운 애정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바라기는 내가 이 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정의 희미한 흔적이나마 독자들에게 가 닿기를. 지상의 모든 눈물겨운 것들에게 이 작품을 바친다.

소설을 살다

이 책에는 소설가로서의 삶과 관련된 글들이 모여 있다. 내가 쓴 소설 작품에 얽힌 사연들과 내 시대의 문학에 대한 소회와 읽어온 소설들에 대한 단편적인 감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식물들의 사생활

굵은 소나무의 줄기를 안으로 파고들 것처럼 끌어안고 있는, 매끄럽고 가무잡잡한 피부의 여체를 연상시키는 때죽나무를 보았습니다. 집 앞의 왕릉에서였습니다. 그 장면은 식물들의 욕망에 대해 생각하게 했습니다. 구도자처럼 하늘을 우러르며 고요하게 서 있는 나무들의 내면에서 들끓고 있는 욕망. 나무들은 그곳에 서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곳에 서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서 있는 거라는 하나의 문장이 아찔한 현기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의인화되지 않은 나무란 없습니다. 문학의 맥락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람과 관련해서만 존재합니다. 신조차도 그러합니다. 내 소설의 주인공들, 나무가 되려고 하고, 혹은 이미 나무가 되어 있는 그 인물들에게 나는 하나의 정원을 만들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들의 정원입니다. 그러나, 혹은 그래서 불안정합니다. 이 소설 안에서 그 장소는 남천이고, 그곳 역시 신의 에덴과는 달리, 혹은 그처럼 불안정합니다.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꽤 많이 뛰어온 것 같은데 아직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도 없습니다. 변한 것은 단지 풍경이었을까요 나는 풍경이 바뀔 때마다 어리석게도 꽤 많이 걸어왔다고 자부하곤 했었던 것 같습니다. 질주하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다만 제자리뛰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깨달음은 좀 허탈하고 겸연쩍습니다. 아직도 문학이 구리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합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그날이 올까요?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어차피 구리 거울로 보는 것이 문학일테니까요.

신중한 사람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힘들고 사람은 여전히 난해하다. 그래서 소설을 쓰지만, 그래서 소설 쓰기가 쉬워지지 않는다. 나는 맷집이 약하고 체력 역시 부실한 편이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느라 행동하지도 즐기지도 못하는 내 인물들을 보면 언짢고 속이 상한다. 그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데도, 그들에게서 세상의 고뇌를 벗겨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나는 그들을 내버리고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는 않았다, 못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사랑한다고 말하고서 사랑하지 않기는 더 어렵다. 내가 내 인물들을 향해 굳이 사랑을 고백하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2014년 여름

심인 광고

시간의 완고함, 혹은 기억의 집요함이라고 할 만한 어떤 불편함이 소설들 위에 얹어져 있는 걸 발견한다. 생의 막다른 지점에 도달한 사람의 내면에서 내 소설들은 자주 죄책감을 발견해낸다.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기억의 집요함에 잡히고 시간의 무거움에 눌리고 회한에 빠짐으로써 사람임을 증명한다는 투의 생각이 이 소설들 속에 들어 있다. 좀처럼 소설들이 명랑해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기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오래된 일기

밖으로 뻗어보려고 하면 안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진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밖에서 당기는 힘 때문에 움찔한다. 그 때문에 긴장이 생긴다는 건 순전한 빈말은 아니겠지만, 그 긴장이 어느 쪽의 지지도 온전하게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생각 역시 순전한 엄살만은 아니겠다. 나는 내 마음의 깊이가 얕고 팔의 길이가 짧은 게 불만이다. 팔의 길이에 대한 염두 때문에 마음이 깊어지지 못하고, 마음의 깊이에 대한 우려 때문에 팔을 늘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기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마음의 얕음과 팔의 짧음을 팔의 길이와 마음의 깊이에 대한 신중한 고려 때문인 것처럼 위장하여 스스로를 달래고 있다는 의심도 든다. 그런데도 갈등이 여전한 걸 보면 그 위장 또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것 같다. 여태 이렇다. 빈말해주고 엄살 들어주고 내 서툰 위장에 넘어가는 척해주는(때로 속은 척하기로 독하게 마음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나의 훌륭한, 이타적인 독자들에게 인사한다. 또 넘어가주고, 넘어간 척해주고, 또 빈말해달라. 그러면 나는 또 엄살 부리고 스스로를 달랠 힘을 얻겠다.

욕조가 놓인 방

당신은 지금 한 편의 연애소설을 읽으려고 한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당신이 지금 읽으려고 하는 소설이 한 편의 연애소설이기를 바란다. 혹은 그렇게 읽히기를. 당신은 성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이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실패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당신이 성공한다면 이 얇은 소설은 조금 더 얇아질 것이고, 당신이 실패한다면 조금 덜 얇아질 것이다.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모든 연애 서사는 거기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의 안쪽을 내보이기 위한 일종의 트릭으로 제법 유용하다. 사연들은 의견을 물어오고(혹은 의견들이 사연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의견들은 이미지의 박을 탄다(혹은 이미지들이 의견들을 구박한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뜻이다.

일식에 대하여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쓴 소설들을 다시 읽으면서 시대의 문장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여기 실린 소설들에 담긴 인식이나 사유는 물론 문장도 1980년대의 것이고, 또 내 이십대 후반의 것이다. 이렇게 살았구나 싶고, 이렇게 썼구나 싶다. [……] 읽다 보면 나중에 쓰인 글들과의 유전적 상관성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은근히 반갑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책을 다시 펴내기 위해서는 이런 정도의 구실이 필요했다. - 신판 작가 후기

전기수 이야기

ㅡ들음으로써 그가 얻는 것보다 말을 함으로써 내가 얻는 이득이 크다면 누가 누구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전기수 이야기'의 화자가 한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제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글을 쓰는 자가 누리는 과분한 복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복이 읽는 이들에 의해 베풀어진 은덕이라는 사실에는 무지했습니다. 저는 씀으로써 얻는 보람이 자연 발화와 같은 자생적인 현상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불씨가 없으면 발화도 없다는 사실을 이제 깨닫습니다.

나는 여전히 소설이 낯설고 어렵다. 여태 시들해지지도 않고 만만해지지도 않는다. 시들하지 않으니 계속 붙어 있게 되고, 만만하지 않으니 처음 만난 것처럼 조심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것이 나의 연애의 방식이다. 그것이 기특하다는 것인지 간혹 사람들이 주목하고 등을 두드려준다. 대견하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용하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위로인 것 같기도 하고 격려인 것 같기도 하다. 위로에서 격려를 받기도 하고 격려에서 위로를 받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과분하다. 문학이라는, 결코 채울 수 없는 거대한 바다를 채우기 위해 바다를 향해 길을 낸 수많은 크고 작은 강들 가운데 아주 보잘것없는 하나의 물줄기로,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두리번거리지 않고 또 한 30년 흐를 생각이다. ― 수상소감 중에서

한낮의 시선

언제나 그렇듯 뿌듯하고 아쉽다. 그렇지만 모퉁이를 돌면 부딪칠 것 같은 알 수 없는 존재, 부딪치기를 바라는지 바라지 않는지도 분명하지 않은, 초월이며 내재인, 미지의 큰 시선과 웬만큼 친해진 것 같긴 하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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