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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한승원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39년, 대한민국 전라남도 장흥 (천칭자리)

직업:소설가 시인

가족:딸이 소설가 한강

최근작
2023년 12월 <사람의 길>

이 저자의 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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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1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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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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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검은댕기두루미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어둠 감지 기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불은 빛을 필요로 하는 자, 잠들어 있지 않고 깨어 있는 자, 어둠을 인식하는 자가 밝히는 것이다. 어둠이 내리자마자 불을 밝히는 자동 가로등은 내부에 어둠 감지 장치를 장착하고 있다. 그 어둠 감지 장치는 자기 불빛 속에 있어서는 안된다. 자기 불빛의 파장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 있어야만 한다. 그 불은 그 가로등이 어둠을 감지한 결과물이다. 세상의 모든 불, 모든 빛은 어둠을 먹고 산다. 소설도 그러하다. 소설가는 어둠 감지 기능이 살아 있는 한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겨울잠, 봄꿈

이 소설은 1894년의 겨울, 패주한 동학군의 지도자 전봉준이 밤을 도와 잠행하다가 민보군에게 붙잡혀 한양으로 끌려가는 천리 길의 기나긴 참담한 여정을 서술한 것이다. 그 여정에서 전봉준이 만난 개 같은 세상을 보면서 나는 진저리치며 구역질을 하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어둠 감지 기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불은 빛을 필요로 하는 자, 잠들어 있지 않고 깨어 있는 자, 어둠을 인식하는 자가 밝히는 것이다. 어둠이 내리자마자 불을 밝히는 자동 가로등은 내부에 어둠 감지 장치를 장착하고 있다. 그 어둠 감지 장치는 자기 불빛 속에 있어서는 안된다. 자기 불빛의 파장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 있어야만 한다. 그 불은 그 가로등이 어둠을 감지한 결과물이다. 세상의 모든 불, 모든 빛은 어둠을 먹고 산다. 소설도 그러하다. 소설가는 어둠 감지 기능이 살아 있는 한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누이와 늑대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어둠 감지 기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불은 빛을 필요로 하는 자, 잠들어 있지 않고 깨어 있는 자, 어둠을 인식하는 자가 밝히는 것이다. 어둠이 내리자마자 불을 밝히는 자동 가로등은 내부에 어둠 감지 장치를 장착하고 있다. 그 어둠 감지 장치는 자기 불빛 속에 있어서는 안된다. 자기 불빛의 파장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 있어야만 한다. 그 불은 그 가로등이 어둠을 감지한 결과물이다. 세상의 모든 불, 모든 빛은 어둠을 먹고 산다. 소설도 그러하다. 소설가는 어둠 감지 기능이 살아 있는 한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다산 1

다산 정약용은 수많은 준봉들을 푸른 하늘 속에 깊이 묻고 있는 보랏빛의 영검하고 웅대한 산이다. 그러한 산에 잘못 들어가면 길을 잃고 조난을 당할 수도 있다. 가령 다산 정약용과 사귄 이후술병이 들어 40세의 나이로 요절한 혜장스님은 길을 잃고 조난을 당한 사람일 터이고, 다산 정약용을 따름으로써 속이 더욱 웅숭 깊어지고 영혼의 체구가 커지고 자유자재의 실사구시적인 선승으로 이름을 드날리게 된 초의스님은 다산이란 산을 잘 탄 사람일 터이다. 나는 초의스님처럼 다산을 잘 타려고 무진 애를 썼다.

다산 2

다산 정약용은 수많은 준봉들을 푸른 하늘 속에 깊이 묻고 있는 보랏빛의 영검하고 웅대한 산이다. 그러한 산에 잘못 들어가면 길을 잃고 조난을 당할 수도 있다. 가령 다산 정약용과 사귄 이후술병이 들어 40세의 나이로 요절한 혜장스님은 길을 잃고 조난을 당한 사람일 터이고, 다산 정약용을 따름으로써 속이 더욱 웅숭 깊어지고 영혼의 체구가 커지고 자유자재의 실사구시적인 선승으로 이름을 드날리게 된 초의스님은 다산이란 산을 잘 탄 사람일 터이다. 나는 초의스님처럼 다산을 잘 타려고 무진 애를 썼다.

멍텅구리배

포항 해양박물관 앞에 멍텅구리배 한 척이 떠 있다. 자기의 시간이 이미 사라져 가버리고 없는 그 배 위에 올라앉아 있는 그 배의 숨결을 듣곤 했다. 그러면서 그 배의 시간을 복원시키기로 결심했다. 그 시간을 찾기 위해 낙월도를 네 차례나 방문했다. 낙월도 앞바다 갯벌밭 여기저기에는 거대한 멍텅구리배의 닻 네댓 개가 보인다. 그들은 로켓 발사대처럼 한쪽 닻개비를 깊이 박아 넣은 채로 자기의 흘러간 시간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멍텅구리배의 시공 속에 나를 1년여 동안이나 가두어 길렀다. 그 결과물이 이 소설이다.

물보라

말로 인해서 늘 절망하곤 한다. 말로써 진실을 드러내려 하지만 말은 늘 그것의 변죽이나 허공에서만 맴돈다. 나는 이런 뜻으로 이렇게 짚어 보이는데, 독자는 엉뚱하게 저런 의미로 저렇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내가 한 말이 나와 독자를 동시에 배반한다. 말이 두렵다. 수도하는 스님들의 경우 말의 절망을 뛰어넘을 때 악[할] 하고 소리치지만, 소설가에게 있어서 그것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은 어찌할 수 없이 또한 말일 뿐이다.

바닷가 학교

얽히고 설킨 실타래처럼 삶의 가닥이 풀리지 않을 때, 그것이 나를 슬프게 하고 절망하게 할 때, 나는 광활하고 짙푸른 고향바다로 달려가 파도소리를 귀청 아프게 듣고 나면 홀맺힌 삶의 가닥이 풀리곤 했고,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곤 했다. 삶의 가닥을 풀리게 하는 지혜와 절망을 치유해주는 약이 바닷물 너울 속에 있었다. 먼바다에서 달려온 파도들이 모래톱과 갯바위를 철썩철썩 치면서 뿜는, 한 순교하던 스님의 목에서 솟구쳐오르던 흰 피 같은 물보라, 음험한 마녀 같은 밤바다 안개, 범람하는 배부름의 만조, 썰물져 쓸쓸해진 갯벌밭, 그것을 기어다니는 갯지렁이와 삿갓고둥과 갯강구와 김과 미역과 매생이들이 치유의 약품이었다.

보리닷되

이제 고백하는데, 토굴에 똬리를 튼 첫날밤에 득량만 바다의 늙은 도깨비 한 놈이 찾아와서 말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잡히고 젊은 한생을 새로이 산 파우스트처럼, 너도 그런 삶을 한번 살고 싶지 않으냐?” 환장할 것 같은 환희에 젖어든 채 내가 대답했다. “그래!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붉은 방·해변의 길손

'소설은 소설이다' 이것은 제 영원한 화두(話頭)입니다. 30년 가까이 이 화두만 들고 몸부림쳤는데도 저는 아직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풀기 위하여 저는 만행하는 스님들처럼 저의 세계로부터 무수히 떠나고 끝없이 방황하고, 그랬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거듭했습니다. 그 별들의 떠돌기 같은 운행을 반복하면서 저는 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새롭게 시작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그 숨겨진 비밀은 아직 제 심중의 어둠 속에 있을 뿐입니다. 이 상은 아마 제 심중의 어둠을 깨치는 데 어떤 계기가 될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바다는 죽음 없는 신의 얼굴, 영원한 시간의 몸짓이다. 죽음 있는 내가 죽음 없는 바다를 보듬고 살면서 쓴 다섯 번째의 시집이다. 『열애일기』 『사랑은 늘 혼자 깨어 있게 하고』 『노을 아래 파도를 줍다』 『달 긷는 집』 이후에 쓴 시들이다. 무한한 시간의 모래 위에 유한한 시간인 내가 만다라를 그리는 것은 무엇일까. 밀물이 밀려오면 지워질 그 만다라는 시간에 먹히지 않고 시간을 먹고 싶은 나의 탐욕일지도 모른다. - 시인의 말

산돌 키우기

오래전, 영산강을 탐사하려고, 전라남도 일대의 25,000분의 1 지도 조각들을 넓은 거실 바닥에 늘어놓고 붙이니 그 강의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해졌다. 나목이 된 노거수(老巨樹)를, 목포에서 담양 쪽으로 가로눕혀놓은 듯싶은 영산강을 일 년여에 걸쳐, 담양 북편의 시원에서부터 목포 앞바다까지 흘러가면서, 강의 잔가지들에 주렁주렁 열린 신화, 전설, 정치, 경제, 문화의 풍경들을 읽어냈듯이, 나는 나의 강을 그렇게 탐사하기로 했다. ‘나’라는 생명체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구에게 어떤 호혜를 입으며 성장하고, 언제 무슨 상처를 입었으며, 그것은 어떤 흉터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로, 무슨 색깔, 어떤 무늬와 결과 옹이들이 생성되고, 그것들이 내 성정과 사상과 삶의 역정을 어떻게 굴절시켜왔고 지금 어떤 자세로, 외계로의 먼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진술하기로 한다. 아마도 나의 마지막 진술이 될지도 모르는 이 책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저술자가 그랬듯) 내가 이야기를 통해 삶의 빛을 얻고, 순전히 이야기의 힘으로 살아왔음을 증명해주는 것일 터이다. 2021년 매화 향기 속에서 해산토굴 노인 한승원

소설 원효 - 전3권 세트

역사 속의 인물을 그린 소설은 반드시 실록일 필요는 없다. 역사의 몫과 자유로운 상상에 의하여 창조하는 작가의 몫은 다르다. 그런데 선인들이 한번 오독하고 잘못 서술해놓은 것을 읽은 후세의 독자들은 그 잘못된 것을 진실로 알고 평생을 살게 마련이다. 내가 원효를 깊이 읽어본 바에 의하면, 원효의 얼굴은 그들의 오독에 의하여 윤곽이나 눈빛이나 살빛이 잘못 그려지고 잘못 색칠되어 있다. 이제 나는 원효를 새로이 올바르게 읽음으로써 오독으로 인하여 잘못 알려진 원효에 대한 관념을 바꾸고자 한다.

시방 여그가 그 꽃자리여

나는 꿈꿀 수 있으므로 행복하다. 오래전부터 꿈꾸듯 내 고향의 문화와 풍경의 속살들을 깊이 읽고 싶었다. 어떤 풍경은 신화적으로 읽고, 또 어떤 부분은 정신분석적.구조적으로 읽고, 또 어떤 것에 대해서는 역사적.철학적.문화인류학적.민속학적.언어학적으로 어원을 따져가며 읽었다. 석가모니와 예수의눈을 빌어 읽기도 하고, 노자와 장자의 눈을 빌어 보기도 하고, 파스칼과 칸트와 푸코의 눈을 빌어 읽기도 하고, 선승들의 눈을 빌어 읽기도 했다. 잘못 읽는다는 뜻의 '오독誤讀'과 깨달은 마음으로 읽는다는 뜻의 '오독悟讀 '은 발음이 같다. 나는 내 고향 풍경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로이 해석하려 했는데, 그것은 신명나는 발견이었고 깨달음의 눈으로 찬양하며 오독하기였다.

아리랑 별곡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어둠 감지 기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불은 빛을 필요로 하는 자, 잠들어 있지 않고 깨어 있는 자, 어둠을 인식하는 자가 밝히는 것이다. 어둠이 내리자마자 불을 밝히는 자동 가로등은 내부에 어둠 감지 장치를 장착하고 있다. 그 어둠 감지 장치는 자기 불빛 속에 있어서는 안된다. 자기 불빛의 파장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 있어야만 한다. 그 불은 그 가로등이 어둠을 감지한 결과물이다. 세상의 모든 불, 모든 빛은 어둠을 먹고 산다. 소설도 그러하다. 소설가는 어둠 감지 기능이 살아 있는 한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은 아버지라는 껍질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인연은 사랑으로 맺어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은 운명적으로 극복이나 부정의 모순 어법으로 성립된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으로 키우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그늘 속에 안주하려 하지 않고 아버지를 이겨내고 자기의 그늘로 아버지를 덮으려고 발버둥친다. 마침내 아버지는 아들보다 먼저 죽어가야 하고, 그리하여 아들의 손에 의하여 매장된다. 그리고 아들의 세상 속에서 아버지는 소외되어 낡은 사진첩 속에 과거의 시간으로만 남게 된다. 또한 아버지를 매장한 아들은 곧 아버지가 되어 자기 아들에 의해서 매장당하게 된다.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은, 내가 읽어낸 '잔인한 우주의 율동으로서의 시간'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나는 지금도 이 소설의 주인공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나와 그들이 살아온 시간과 공간은 이승의 삶과 죽음 저쪽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삶이 걸림 없이 넘나드는 자유와 사랑의 공화국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시간이다. 그 시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건설하기도 하고 파괴시키기도 한다. 그 시간 앞에서는 살아간다는 것과 죽어 간다는 것이 하나이고, 배부르게 먹고 마시고 이성을 사랑하는 몸뚱이와 늘 비워 보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마음이 하나이고, 나와 우주가 하나이고, 선과 악이 하나이고, 신과 악마가 하나이고, 부처와 예수가 하나이고, 부처와 중생이 하나이고, 여호와 하나님과 배추벌레가 하나이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하나이고, 흙과 돌과 금덩이가 하나이고, 기쁨과 언짢음이 하나이고, 물과 산이 하나이고, 문득 깨달음과 점진적으로 닦아 가는 것이 하나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더욱 오롯한 '하나'로 되어 가기인 것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이 소설은 '깨달음을 얻어 가는 길(구도)'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인생살이의 마지막에 이루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우주 한복판에 커다란 꽃 한송이로서 장식되는 것입니다. 그 꽃 한송이가 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구도를 통해서 얻은 깨달음의 보석을 가엾은 사람들과 더불어 고루 나누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가장 높은 경지입니다.

앞산도 첩첩하고 (리커버)

사람들이 가는 사람의 '길'이란 것은, 한없이 길어서 '길'인 것이고,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그 길을 다시 열어, 하늘 세상 저 너머까지 길게 뻗어나가게 하기 위하여 피땀 흘리는 운명이므로, 모두모두 그 '길'을 영원의 시간을 향해 뻗어가게 하면서, 간절하고 숭엄하게 기라고 찬양하며 걸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 길 첫머리에 세워진 '앞산도 첩첩하고'라는 이정표를 복제해다가 이제, 내 밤으로 가는 황혼과 땅거미의 어름, 바다로 들어가는 강의 하구 연안의 모래 언덕 해당화 숲에다가 세운다. 그러면서, 그 이정표 주위에 석가모니의 깨달음 같은 까치 노을이 피어나기를 바란다. --- 저자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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