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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은봉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53년, 대한민국 충청남도 공주

직업:시인 대학교수

최근작
2022년 8월 <아프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걸레옷을 입은 구름

자연은 섬세하고 다양한 문양이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세상에 많은 자취와 흔적을 남긴다. 이때의 자취와 흔적을 이미지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자연이 만드는 이미지는 일종의 기호이고 문자이다. 이때의 기호와 문자는 즐거운 콧노래를 담기도 하고, 서러운 웅얼거림을 담기도 한다. 지금은 고통의 신음을 압축하고 있어 세상을 아프게 하지만. 바뀌고 변하는 자연이 만드는 기호와 문자…… 이때의 기호와 문자를 바로 읽는 일이 시인의 임무이다. 물론 이들 기호와 문자를 바로 읽는 일은 어렵고 힘들다. 신호이기도 하고 암호이기도 한 자연의 언어……. 자연의 언어는 신의 언어이다. 신의 언어는 진리의 언어이다. 진리의 언어를 바로 읽으려면 신의 눈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자연의 질서와 혼돈을 읽을 수 있다. 자연의 질서와 혼돈은 크고도 작아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자연의 언어에는 삶의 언어도 포함되어 있다. 삶의 문양이 만드는 진리들…… 이 시집에는 삶의 문양이 만드는 진리들에 대한 독해도 들어 있다. 세상에 나온 지 60년, 시단에 나온 지 30년이다. 하지만 마음은 아직 한여름의 초록 숲길을 걷고 있다. 물론 머잖아 내게도 풍성한 가을의 들판이 펼쳐지리라, 나뭇가지 앙상한 겨울의 숲이 찾아오리라.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게 무슨 다른 길이 있나? 순수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죽음의 벼랑에 이를 때까지 시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수밖에.

걸어 다니는 별

사막을 지나고, 평원을 지나고, 진흙 구렁을 지나고, 이윽고 산골짜기마다 콸콸콸 시냇물이 흐르는 숲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숲속에는 잣나무도, 개금나무도, 밤나무도 아름을 이루며 그늘 많은 잎사귀를 피우고 있다고. 거기 어디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오막살이가 있고, 상추와 부추와 쑥갓과 아욱이 자라는 텃밭이 있고, 마침내 시원한 물이 퐁퐁퐁 솟아오르는 두레우물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앞마당에는 중병아리 몇 마리 까막까치를 불러 모이를 쪼고 있다고. 바깥마당에는 토끼가 깡총대고, 고양이가 얌얌 세수하고, 강아지가 까무룩 졸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더러는 반쯤 벌거숭이인 어린아이가 머리칼이 파뿌리인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뛰어놀고 있다고. …… 돌이켜 보면 아직도 이들 숲속 마을까지의 길은 멀다. 숲속 마을 대신 여전히 역한 냄새로 가득한 시멘트 빌딩 속을 헤매는 변덕스러운 마음만 여기저기 거친 언어로, 조악한 리듬으로 아프게 흩어져 있을 뿐.

길은 당나귀를 타고

이 시집은 그렇게 튀어나온 당나귀들로 채워져 있다. 지금까지의 생애에서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튀어나온 당나귀들이다. 나는 내 운명이 만들어온 이 시기의 고통을 미워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당나귀들이 함께 해주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당나귀들도 느리고 조용한 마을로 건너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평지 위의 아스팔트도 10년을 버려두면 묵정밭이 된다. 예의 마을로 건너가는 데 여기 이 당나귀들이 단 한 줌의 소식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달과 돌

백지 위에 펜글씨로 직접 쓴 시들을 모아 시 선집을 간행한다. 오랫동안 별렀던 일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주로 짧고 서정적인 시를 모았다. 다른 뜻은 없다. 긴 시를 백지 위에 직접 쓰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이번 기회에 많은 반성을 했다. 앞으로는 시를 길게 쓰지 말아야지. 일을 마치고 시집을 간행하게 되어 기쁘다. 이 시집에 실리는 시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빈다. 2016. 2. 15

봄바람, 은여우

<바람에 관한 몇 가지 상념> 바람은 무엇인가. 바람은 누구인가. 바람은 어디서 살고 있나. 바람은 몇 살인가. 질문으로, 상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람이다. 바람은 사람이다. 사람은 바람이다. 바람은 세상이다. 세상은 바람이다. 바람의 역사를 살고 있는 것이 사람이다. 바람은 공기이고, 돌은 흙이다. 공기인 바람도 4원소 중의 하나다. 바람은 소리다. 바람은 뜻이 아니다. 바람은 언어다. 기의언어가 아니라 기표언어다. 기표바람은 기의바람을 끌고 다닌다. 기의바람은 기표바람을 쫓아다닌다. 기의바람을 만드는 것은 기표바람이다. 기표바람을 따라 기의바람은 그때그때 살짝 태어났다가 사라진다. 기표바람을 따라 금방 날아가는 잠자리 같은 기의바람! 기표바람이 기의바람을 만드는 곳은 상황, 선택과 배열의 관계다. 기표바람은 잠깐 기의바람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기표바람은 그렇게 이미지다. 움직이는 것이 바람이다. 바람은 움직이는 기氣다. 운기運氣하는, 활동하고 움직이는 기! 바람은 ‘바라다’라는 동사의 명사다. 바람은 희망이기도 하고, 꿈이기도 하다. 희망이나 꿈처럼 바람은 이루어지기도 하고,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 저 혼자 봇도랑에 처박혀 있기도 한다. 사람은 말한다, 바람은, 꿈은, 희망은 이루어진다고. 바람이, 꿈이, 희망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바람은 하단전下丹田에서 솟구쳐 오르는 욕망의 기표이다. 그렇다. 바람은 리비도의 기표다. 거개의 바람은 붕새처럼 하늘로 솟구쳐 오르지 못하고 텃새처럼 산기슭의 초가집 주변이나 맴돈다. 바람은 추상이나 관념으로 이해되기 쉽다. 바람은 추상이 아니라 구상이다. 바람은 끊임없이 형상이다. 이때의 형상을 누구나 다 바로 읽어내는 것은 아니다. 바람은 형상이 아니다. 나뭇잎을 흔들거나 비닐봉지 따위를 날려 형상을 이룰 뿐이다. 형상이 이미지를 가장 중요한 자질로 삼는 까닭이 여기 있다. 바람이 만드는 형상도 이미지다. 아니, 바람 자체가 이미지다. 언어도, 문자도 이미지다. 바람이 만드는 저 많은 언어를, 문자를, 이미지를 누가 다 읽어낼 것인가. 나는 겨우 몇 개를 골라 시로 해독해 볼 따름이다. 이처럼 바람은 미지未知이다. 본래 미지로부터 오는 것이 이미지이다. 이미지인 바람이라는 말로 만든 시! 여기 그 물질이 살짝 있다.

생활

시들이 자꾸 어려워지고 있다. 요즈음은 추상적 관념과 함께하는 막연한 진술로 시를 만들기까지 한다. 이들 시에서는 나날의 생활이 만드는 구체적인 물질을 찾기 힘들다. 일상의 이미지가 부드럽게 녹아 있기보다는 조작된 관념이 단단하게 뭉쳐 있는 것이 요즈음의 시이다. 아무런 내포도 유추할 수 없는 관념적 진술의 시를 즐길 만큼 내 마음은 열려 있지 못하다. 그러니 나로서는 관념적 진술을 조작하고 있는 시들로부터 비켜설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번 시집의 이름을 ‘생활’이라고 붙인다. 이름을 이렇게 붙인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시집에 「생활」이라는 시가 들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일련의 시들, 곧 ‘생활’의 시들에서 내가 나날의 삶에서 깨닫는 진리나 진실을 담으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번의 시집 『생활』은 이전의 시집 『첫눈 아침』에 실려 있는 정신과 방법을 이어받고 있다고 해야 옳다. 이는 곧 이 시집과 함께하고 있는 시들이 일상의 삶에서 깨닫는 진실 혹은 진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를 구체적인 생활에서 획득하는 깨달음의 형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시를 구체적인 생활에서 획득하는 ‘발견의 형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는 시를 구체적인 생활에서 획득하는 ‘지혜의 형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번의 시집에서는 시를 일상의 삶에서 회득하는 ‘깨달음의 형식’, ‘발견의 형식’, ‘지혜의 형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로서는 이번 시집의 시들이 갖고 있는 생활의 깨달음이나 발견, 지혜 등이 나날의 역사가 이행하며 만드는 자유, 평등, 사랑, 평화의 정신과 함께하기를 빈다. 이것이 이번 시집이 갖고 있는 그 나름의 변별성이라고 나 자신을 위로하며 또 한 권의 시집을 발간하는 일에 감히 용기를 낸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직을 퇴직한 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물론 이번의 시집은 퇴직 후에 간행하는 첫 번째 결과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번 시집에 실려 있는 시들 모두가 퇴직 후에 쓴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시집의 시들 역시 퇴직 전 광주에서 쓴 것들을 모으고 있다. 언제쯤 퇴직 후 세종에서 쓴 시들을 모아 시집을 낼까. 독자 여러분의 격려와 질정을 빈다. 2019년 초가을 세종특별자치시 종촌동에서

시와 깨달음의 형식

선불교에서는 일상의 삶에서 획득되는 자잘한 깨달음을 흔히 한 小識이라고 부른다. 나는 자주 이때의 한 소식을 심미적인 언어로 노래하는 것이 시라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이러한 생각에는 시가 순수하고 무구한 삶이 이루는 드높은 정신의 경지를 심미적으로 응축하는 언어예술 형식이라는 이해가 들어 있다. 따라서 그러한 시에는 맑고 투명한 서정과 함께하면서도 당대사회의 온갖 모순을 돌파해내는 사람살이의 지혜가 함축되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이때의 지혜가 각각의 시에 혼란스러운 관념의 뭉치로 내던져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육체와 함께 하면서도 나날의 일과 놀이가 만드는 사물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이때의 지혜, 곧 정신의 한 경지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물성은 형상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거니와, 형상성이 이미지, 이야기, 정서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프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글을 쓰는 고통과 즐거움 산문집이라는 이름으로 한 권의 책을 출간한다. 첫 번째 산문집이다. 이 책에는 모두 44편의 크고 작은 산문이 들어 있다. 그러니 제법 많은 글이 모여 있는 셈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각각의 글은 분량이 일정하지 않다. 이들 글을 쓰는 동안 분량을 고려할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이 책의 글들이 지니는 한계 때문이다. 한계라고 했으나 그것이 정작의 한계인지는 모르겠다. 실제로는 이 책에 실려 있는 글들이 새로 쓴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 책을 간행하기 위해 따로 글을 쓸 만큼 산문에 대한 내 의지가 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나 평론 등 문학작품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발표한 이래 이른바 ‘산문’이라고 할 수 있는 글들 또한 적잖이 쓴 바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동안 이들 산문은 아무렇게나 산개되어 여기저기 나뒹굴어 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으로서는 이들 산문이 아주 버려지지는 않은 것만도 큰 다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들어서야 서둘러 산문집도 한 권 간행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다. 이번에 용기를 내어 책으로 간행하려고 산문이라고 할 만한 글들을 모아 보니 무려 100여 편이 훨씬 넘었다. 이를 확인하며 한편으로는 내가 언제 이렇게 많은 산문을 썼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형편이 이러하니 일정한 기준을 정해 가려 뽑은 원고들을 중심으로 책을 간행할 수밖에 없었다. 가려 뽑고도 남은 글들이 상당한데, 그것들 또한 여기저기 나뒹굴다가 일실逸失되지 않고 책으로 묶일 수 있기를 빈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거개가 신문이나 잡지 등 여러 매체에 이미 발표되었던 것들이다. 하지만 각각의 글들이 발표된 시간은 모두 다르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쓴 글들을 이 책에 모아 놓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1984년부터 2021년까지 쓴 글들이 무작위로 실려 있다. 처음에 쓴 글과 마지막에 쓴 글 사이에 무려 36년이나 시간적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이때의 거리는 내가 시인으로 등단하던 때부터 지금까지의 긴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는 내 문학 인생 전체가 무르녹아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주 긴 시간적 거리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글들은 서로 주장이 어긋나거나 논리가 모순된 예가 거의 없다. 세상을 바라보는 필자 나름의 관점이 일관되게 드러나 있다는 얘기이다. 독자들이 시종일관 온유하고 돈후敦厚한 자세로 사람살이와 사물살이를 깊이 있게 끌어안으려는 필자의 마음을 정성껏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강조하거니와, 이 책의 글들은 사변적인 주장이나 논리를 별로 담아내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구체적인 삶과 생활에서 겪는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감흥을 섬세하게 담아내려고 한 것이 이 책의 글들이다. 삶과 생활의 아픔과 슬픔, 사랑과 연민이 만드는 다양한 서정과 서사를 훈훈한 마음으로 보여 주려고 한 것이 이 책 속의 산문들이라는 뜻이다. 원고를 모으고 배열하는 과정에 책의 제목을 『아프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로 정했다. 편편의 글이 모두 ‘사랑의 빵’이 아주 큰 사람이 겪는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회감回感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빵’이 아주 큰 사람은 사랑이 주는 아픔과 슬픔도 크기 마련이다. ‘사랑의 빵’이 아주 큰 사람을 어떻게 달리 표현할 수 있을까. 고전적으로 말하면 ‘정이 많은 사람’, 모든 사람과 사물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괜찮다. 아프지 않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이 책의 글 중에는 이른바 칼럼이나 에세이라고 부를 만한 글들도 없지 않다. 신문이나 잡지의 청탁을 받고 쓴 칼럼이나 에세이도 얼마간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서정적이고도 서사적인 회감回感을 바탕으로 한 산문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려고 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이 책의 글들이 사람살이와 사물살이의 아픔과 슬픔을 깊이 있게 끌어안으면서도 ‘따듯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징표’로 읽히기를 빈다. 2022년 7월 세종특별자치시 종촌동 청리당 서재에서

알뿌리를 키우며

한때는 시로 하여 내가 온통 봄 과수원 꽃더미로 피어날 줄 알았다. 한때는 시로 하여 세상이 온통 가을 과수원 사과 향기로 빛날 줄 알았다. 이제 그런 나는 없다. 이제 그런 세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봄 과수원의 흐드러진 꽃더미를 꿈꾸고 있다. 가을 과수원의 사과향기를 찾아 잉잉거리는 벌떼의 마음을 잊지 못하고 있다. 잊지 못하는 마음으로 여기 또 수많은 나무들을 베어와 종이를 만들고, 수많은 글자들을 옮겨와 사람들과 세상 앞에 내놓는다. 남들이 시선집이라고 부르니 나도 시선집이라고 부르는 언어뭉치이다. 여섯 번째 시집을 간행한 지도 꽤 시간이 지나고 있다. 지나고 있는 시간들을 모아 일곱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그 사이 여기 이처럼 나를, 내 시를, 내 생각과 함께 뒤돌아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당연히 시간의 순서에 따르고 있는 공간이다. 뒤돌아보니 이 공간 속에는 나와, 내가 살아온 시대의 고민이 다 들어 있는 듯 싶다. 딴에는 시라는 언어예술 형식을 통해 자본주의 근대라고 하는 이 세상에 끊임없이 쓴 약을 주사하려 했기 때문이리라.

책바위

죽음의 물결로 넘실대는 강의 한복판이다. 기껏 뗏목을 타고 어떻게 이 강, 거슬러 오르나. 반쯤 썩은 피라미 떼 뗏목 위 마구 떨어져 내린다. 거슬러 오르지는 못해도 노 저어 건널 수는 있을까. 건널 수는 없어도 물결 따라 흐를 수는 있을까. 이 강, 그래도 그냥 흐르기만 해서는 안 되지. 거슬러 오르지는 못해도 강 건너 저쪽 숲 마을 향해 악착같이 노 저어야지. 뗏목 위 죽음의 말들, 가득 널브러질지라도.

초록 잎새들

이미지가 살아 있는 시를 쓰고 싶다. 이야기가 숨어 있는 시를 쓰고 싶다. 정서가 충만한 시를 쓰고 싶다. 이들 형상 속에 깨달음이 꿈틀대는 시를 쓰고 싶다.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여러 형상이 하나의 의미로 응축되고 수렴되는 시를……. 지구라는 행성에서 69년째 살고 있다. 그래서인가. 69편의 시를 여기 모은다. 69편의 시는 한 편의 시. 69는 하나, 69는 원, 원은 태극, 태극은 리비도……. 나는 69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선불교에서는 다즉일(多卽一), 일즉다(一卽多)이라고 하지 않는가. 서정(抒情)은 풀과 나무의 이름으로, 새와 짐승과 벌레 등의 이름으로 되살아난다. 생생하고 구체적인 삶의 언어로 하여, 생기있고 활기 있는 사물의 언어로 하여 되살아나는 것이 서정이다. 서정이 깨어 있는 시를 쓰고 싶다. 진실이 함축되어 있는 시를. 2021. 6. 청리당에서 이은봉

풍경과 존재의 변증법

본래 좋은 시는 보이는 것, 곧 가시의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곧 비가시의 것이 길항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창작되기 마련이다. 보이는 것, 곧 가시의 것은 현상의 물질세계를 뜻하고, 보이지 않는 것, 곧 비가시의 것은 본질의 정신세계를 뜻한다. 풍경과 존재, 형상과 진리, 현상과 본질이 충돌하고 길항하는 가운데 태어나는 것이 시라고 하더라도 나는 늘 시에서 존재보다는 풍경을, 진리보다는 형상을, 본질보다는 현상을 앞세워 오고 있다. 이들과 관련해 선후를 이야기하는 것이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이미지인 물질이 진리인 정신보다 선행하는 시를 선호해온 것이 나이기는 하다. 본래 나는 시라는 것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을 통해 의(意)를 노래하고,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을 통해 법(法)을 노래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변주와 착종을 십분 받아들이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관점으로 시를 읽고 시를 써온 것이 그동안의 나이다. 선후를 말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상상의 경우이든 환상의 경우이든 내가 이처럼 의미보다는 이미지가 선행한다는 관점으로 시를 읽고 써온 것은 사실이다. 선행하든 후행하든 이는 곧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길항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좋은 시가 태어난다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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