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서울대 인문대 미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沿革」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등을 『문학과 지성』에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등장했다.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와 총장을 역임했다.
시집으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나는 너다』 『게 눈 속의 연꽃』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_없는 길 (『나는 너다』 1987년 1월 풀빛 초판)
서울 美文化院 점거농성 사건으로 세상이 시끌벅적했던 작년 늦봄, 김지하를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華嚴’과 ‘다스 카피탈’을 포괄하는 大世界觀을 말했다. 이 테제, 혹은 공안이 나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禪師들은 劍客을 닮았다. 내 골통을 半으로 가르는 가장 빠른 생각은 메모다. 메모랜덤 : 기억을 위한 符籍!
세번째 詩集을 묶는다.
두번째 시집을 묶을 때 함께 넣을까 말까 망설였던, 메모 같은 시들이다. 그 가운데 일부를 올여름까지 드문드문 발표했었고, 몇 편은 새로 쓰기도 했다. 이미 써놓았던 것들을 나중에 볼 때 치밀어오는 부끄러움이 加筆을 하게 한 곳도 몇 군데 있다. 제목을 대신하는 數字는 서로 변별되면서 이어지는 내 마음의 불규칙적인, 자연스러운 흐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말하고 기록하는 모든 형식들에 관심이 몰려 있던 그 당시 나로서는 電文을 치듯, 火急하게 아무거나 詩로 퍼 담으려는 탐욕에 급급했던 것 같다. 지금 보니, 냉랭하다. 活活 타오르는 시를 언제쯤 쓸 수 있을까?
詩들을 정리할 때마다 두렵다. 마음이 체한다. 이제 어디로 빠져나갈까? 없는 길을 찾아 나가기가 이렇게 버거울까?
1986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