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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에세이

이름:김성동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47년, 대한민국 충청남도 보령 (전갈자리)

사망:2022년

최근작
2022년 11월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

김성동

1947년 음력 11월 8일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났다. 내림줄기 있는 유가에서 어릴 때부터 우국지사 유학자 할아버지한테 한학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해방 바로 뒤 뒤죽박죽과 한국전쟁 소용돌이 속에 아버지와 큰삼촌은 우익한테 외삼촌은 좌익한테 처형당하고 ‘아버지’와 ‘집’을 빼앗긴 채 유·소년기를 줄곧 전쟁난리와 이데올로기가 남긴 깊은 흉터 속에서 헤맸다. 1954년 옥계국민학교 입학, 1958년 서대전국민학교로 전학, 1960년 삼육고등공민학교 입학, 1964년 서라벌고등학교 2학년 2학기로 편입했고 1965년 3학년 1학기에 (3월쯤) 자퇴서를 내고 도봉산 천축사로 (5월쯤) 출가·입산해서 지효대선사(智曉 大禪師) 상좌(上佐)가 됐다. 법명 정각(正覺). 산문(山門) 안에서는 산문 밖을 산문 밖에서는 산문 안을 그리워했다.
1975년 《주간종교》 종교소설 현상 공모에 사흘밤낮 걸쳐 쓴 200자원고지 120장짜리 단편소설 「목탁조(木鐸鳥)」가 김동리 선생 선정·당선해서 활자화됐으나, 불교계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전체 승려를 모독했다는 조계종단 몰이해로 만들지도 않은 조계종 승적을 빼앗겼다.

■1976년 늦가을 하산해서 1978년 ‘《한국문학》 신인상’ 현상공모에 중편소설 「만다라」가 당선하였다. 이듬해인 1979년 이를 장편으로 고쳐 펴내어 문단과 독서계에 커다란 메아리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섬세하고 빈틈없이 느긋하게 독장치는 ‘조선 문체’로 한국 근·현대사 생채기와 구도(求道) 나그넷길에서 ‘있어야 할 까닭’을 더듬어 찾는 문제작들을 널리 알려왔다.
1998년 《시와 함께》에 고은 선생 추천으로 시 「중생」 외 10편을 발표하며 시작(詩作)활동도 하였다.
■1983년 해방전후사를 밑그림으로 하는 장편소설 『풍적(風笛)』을 《문예중앙》에, 1960·1970년대 학생운동사를 다룬 장편소설 『그들의 벌판』을 《중앙일보》에 이어싣다가 좌익 움직임을 다룬 속뜻과 반미적 속뜻이 문제되어 각각 2회·53회 만에 중동무이되었다. 1983년 중편소설 「황야에서」로 <소설문학 작품상>을 받게 되었지만 문학작품을 상업적으로 써먹으려는 주관사 측 속셈에 맞서 수상을 뿌리쳤다.

▲소설집 『피안의 새』(1981), 『오막살이 집 한 채』(1982), 『붉은 단추』(1987), 『그리운 등불 하나』(1989), 『민들레꽃반지』(2019), 『눈물의 골짜기』(2020) 등 ▲장편소설 『만다라』(1979), 『집』(1989), 『길』(1991), 『꿈』(2001), 『국수(國手)』(2018) 등 ▲우의(寓意)소설 『김성동의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1981), 『염소』(2002) ▲산문집 『부치지 않은 편지』(1981), 『그리고 삶은 떠나가는 것』(1987), 『미륵의 세상 꿈의 나라』(1990), 『김성동 생명에세이』(1992·원제 『생명기행』), 『미륵의 세상, 꿈의 나라』상권(1993), 『김성동 천자문』(2004·2022), 『현대사 아리랑-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2010), 『한국 정치 아리랑』(2011), 『염불처럼 서러워서』(2014) 등이 있다.

■신동엽창작기금(1985), 행원문화상(1998), 현대불교문학상(2002)을, 단편 「민들레꽃반지」로 제1회리태준문학상(2016), 소설집 『민들레꽃반지』로 요산김정한문학상(2019)을 받았다.

■2021년부터 2년 못 되게 충청북도 충주에서 살면서 빼어나게 아름다운 ‘김성동체’로 글과 글씨와 깨끗한 마음과 아름다운 세상을 짓고자 애를 태웠고, 2022년 9월 25일 일요일 오전 이 세상을 떠났다.

- 약력 이서방 제공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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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

저자의 말

<눈물의 골짜기> - 2020년 7월  더보기

배고프고 외롭고 그리웠습니다 이 많이 모자라는 중생을 소설가로 만들어준 사람은 우습게도 대천경찰서 대공과 사찰계 형사였으니, 1958년 찔레꽃머리였습니다. 그때 열두 살 난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소생은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옛살라비 떠나 한밭이라는 대처로 부자리를 옮겼던 것인데, 그만 집을 잃어버렸던 것이었지요. 이사한 날 도청 곁 법원청사 앞에 아그려쥐고 앉아 하염없이 아버지 생각을 하다가 그만 날이 저물었던 것이니,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다는 말인가?’ 길을 잃고 한참을 가리산지리산 하다가 집으로 갔는데, 철 늦은 가죽잠바 걸치고 완강한 어깨에 눈매 사나운 그 사내는 할아버지 잡고 일장훈시를 하던 것이었습니다. “왜 여기로 이사를 왔느냐?”고 물이 못 나게 종주먹을 대다가 누가 찾아오는지 한 달에 한 차례씩 경찰서 대공과에 반드시 자진신고를 하라는 것이었지요. 아니면 불고지죄(不告知罪)로 잡아가겠다는 으름장이었습니다. 송진구멍 숭숭 뚫린 송판쪼가리로 두른 울 밖까지 배웅 나간 어린아이를 삵의 눈으로 돌아보며 씹어뱉던 그 한마디 말 이 평생 화두話頭가 되었으니, “붉은씨앗이로군!”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면서 입천장에 적이 앉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론가 끌려가신 채 상기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는 생이지지(生而知之)한 두남재(斗南才)였다는 말씀이었지요. 일송삼백(日誦三百)이니, 하루에 3백 자를 외워 사흘 만에 책 한 권을 떼어 마쳤다는 것이었습니다. “봉생봉(鳳生鳳)이요, 용생용(龍生龍)이라구 헸넌듸……. 호부(虎父)에 긘자(犬子) 날 리 웂다던 옛으른 말씀두 증녕 허언(虛言)이더란 말인가…….” 봉황새는 봉황새를 낳고 용은 용을 낳게 마련이며, 범 같은 아비한테서 가히 같은 자식이 태어날 리 없다는 그 말씀이야 물론 원통하고 절통하게 땅보탬시킨 자식을 그리는 애잡짤한 마음이 녹아든 것이겠지만, 도둑처럼 8·15를 맞고 벼락처럼 6·25가 터지면서 생때같은 장차長次 두 자식을 생으로 잃은 그 늙은 유생(儒生)은 그렇게 허희탄식(??歎息)을 하며 빛바랜 창호지로 좀책을 매어주시던 것이었습니다. “문즉인(文則人)이라, 문즉인이요 문긔스심(文氣書心)이라. 글은 곧 사람이라. 글은 곧 긔요 글씨는 곧 마음이니, 다다 그 긔를 똑고루게 모으구 그 마음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넌 사람만이 올바르게 글을 짓구 또 글씨를 쓸 수 있너니…….” 할아버지 성음(聲音)은 가느다랗게 떨려 나오던 것이었습니다. “애통쿠나, 하날은 그 재조를 투긔허야 츤재넌 일쯕 데려가시구……. 무지렝이덜만 남어서 시상을 더구나 난세루 맨드넌고녀.” “삼절오장이여.” 저저금 제 투쟁경력을 뽐내는 자리에서였습니다. 이른바 문민정권이 들어서면서 ‘빵잽이’를 머리로 한 세상에서 말하는 바 ‘민주화인사’들이 모여 곡차일배(穀茶一杯) 하며 씩뚝깍뚝하던 ‘서울의 봄’ 때 이 중생이 한 말이었으니 ‘삼절(三節)’은 나라의 안녕과 인민대중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침략자와 맞서다 대나무가 쪼개지듯 그렇게 쪼개져 버린 선원(仙源) 중시조(中始祖) 할아버지와, 경술국치 때 곡기 끊고 자진(自盡)으로 왜제에 앙버티신 증조할아버지와, 왜제 고빗사위와 해방 공간에서 항왜·항미투쟁을 벌이다 꽃잎처럼 떨어져 버리신 아버지를 말하고, 오장(五長)은 모두가 일매지게 평등하고 자유로와서 행복한 삶을 살자던 ‘백일천하 인민의 나라’에서 이지가지 위원장을 맡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어머니와 큰삼촌과 그리고 진보문인 동아리인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소설분과 위원장을 맡았던 이 중생을 말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새 세상을 그리워하며 ‘민들레꽃반지’를 닦던 제 어머니 열반 에 향을 사뤄주신 어른들께 엎드려 큰절 올리나이다.> 어머니를 다비(茶毗) 저쑵던 불구덩이 속으로 반돈짜리 민들레꽃반지 던지며 불렀던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왕생극락하실 “어머니 아버지!”였습니다. 이 많이 모자라는 중생 삶을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배고프고, 외롭고, 그리웠다’일 것입니다. 그런데 배고픔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외로움이었고, 외로움보다 더구나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리움이었습니다. 그리움을 찾아가는 배고프고 외로운 오솔길이 문학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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