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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에세이
국내저자 > 예술

이름:김용준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04년, 경북 선산(善山) (물병자리)

사망:19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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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근원수필 (오리지널 초판 표지 디자인)>

김용준

경북 선산(善山) 출생의 동양화가이자 미술평론가·한국미술사학자·수필가·교육자·장정가로, 호는 근원(近園)·검려(黔驢)·우산(牛山)·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벽루산인(碧樓山人)·반야초당주인(半野草堂主人)·매정(梅丁) 등이다. 1904년 2월 3일 경북 선산(善山)에서 농사를 지으며, 한약방을 운영하던 아버지 김이도(金以燾)와 어머니 김옥순(金玉順) 사이에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아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세 살 때 개울에서 본 송사리를 그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915년, 충북 영동에 있는 황간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그 전까지는 부친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다.

1920년 4월에 김용준은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1923년, 20세 되던 해에 전통 화가와 양화가들이 운영하는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의 청소년 대상 연구생 지도 수업에서 이마동(李馬銅), 구본웅(具本雄), 길진섭(吉鎭燮), 김주경(金周經) 등과 함께 미술 학습을 시작했다. 1924년에는 이종우가 운영하는 도화 교실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는데, 같은 해 학생 신분으로 제 3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동십자각(東十子閣)>(원제 <건설이냐 파괴냐>) 가 입선되어 화제가 되었다.

1925년에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이듬해 재학 시절 만났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 진숙경(秦淑卿)과 결혼했다. 같은 해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해 김주경, 길진섭, 이마동과 동기가 되었다. 김용준은 표현파를 추구하는 유학생들의 모임인 백치사(百痴社)를 조직하기도 했으며, 여기서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을 만나 평생의 지기가 되었다. 1927년에는 당대 프로 예맹 이론가들을 비판하는 <화단 개조>, <프롤레타리아 미술 비판>을 발표해 임화 등의 반격을 받았으며, 이때 미술 비평가로서 국내 화단에 등단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도쿄미술학교 동문들과 함께 동미회(東美會)를 조직하고 대표가 되었고, 향토회를 조직하고 창립전에 <정물>, <풍경>, <꽃> 등을 출품했다. 또한 동문인 길진섭, 이마동 등과 백만양화회(白蠻洋畵會)를 조직하고 주도해 나갔으며, <백만양화회를 만들고>, <제9회 미전과 조선 화단> 등의 평문을 발표했다.

1931년 2월, 도쿄미술학교 졸업 작품으로 ‘달리는 기차가 전복되는 그림’을 그려 제출했으나 자본주의 사회의 부패상과 멸망상을 보여 주었다 해서 압수당하고, 이후 <여인상>으로 대체해 제출하고 졸업했다. 귀국해 중앙고보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제2회 향토회 전람회’, ‘제2회 서화협전(書?協展)’, ‘동미전(東美展)’ 등에 작품을 출품했으며, 미술 평론 <동미전과 녹향전(錄鄕展)>, <서화협전의 인상>, <미술에 나타난 곡선(曲線) 표징(表徵)>, <화단 일 년의 회고> 등의 글을 발표했다. 당시 한국 화단의 주요 논제였던 ‘조선 향토색론’을 앞장서서 이끌어 나갔는데, 민족 정서를 조선 향토색의 핵심으로 내세웠다. 특히 <회화로 나타나는 향토색의 음미>는 향토색과 관련된 대표적 글이라 할 수 있다.

1934년 도쿄미술학교 출신들과 함께 목일회(牧日會)를 조직하고, ‘제1회 목일회 전람회’에 <자화상>, <풍경> 등을 출품했다. 같은 해부터 보성고보 미술 교사로 재직하기 시작했다. ‘목일회전’의 후신인 ‘목시회(牧時會) 전람회’에 <오월>, <정물>, <소품> 등을 출품했다.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소설가이자 지기였던 이태준과 더불어 골동 취미에 빠지기 시작해 전통 미술에 대한 애정을 평론에 담아냈다. 또 수필 <서울 사람 시골 사람>, <백치사(白痴舍)와 백귀제(白鬼祭)>를 발표하는 등 미술과 삶에 대한 수필을 이때부터 꾸준히 발표했고,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론>, <김만형(金晩炯) 군의 예술>(1942)과 같이 당대 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도 썼다. 1939년 3월에는 딸 석란을 입양했다. 같은 해 2월, 월간 문예지 ≪문장≫이 창간되면서, 길진섭과 함께 ≪문장≫의 표지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940년에 발표한 미술 평론 <전통에의 재음미>를 통해 조선 고전 전통의 부활을 제창했다. 1944년에는 결핵을 앓게 되어 성북동 자택인 ‘노시산방(老枾山房, 당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65-2)’을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에게 넘겨주고 의정부로 이주했다.

해방 후 총 186명의 미술가들을 총괄한 최대 미술가 조직이었던 ‘조선 미술 건설 본부’에 참가해 동양화부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46년 보성중학교 교사를 퇴직하고 서울대 회화과 교수로 취임했으며, 미술애호회에 참가했고 미술 평론 <명일의 조선 미술>을 발표했다. 1947년에는 <민족 문화 문제>, <광채 나는 전통> 등의 평문을 통해 식민 잔재 청산을 주장했다. 1948년 이후 잡지 ≪학풍(學風)≫에 다수의 수필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표지화를 그렸다. 같은 해, 국대안 파동의 여파로 서울대 교수직을 사퇴하고 동국대학교 교수로 취임했으며, 1949년 동국대학교 강당에서 ≪근원수필≫ 출판 기념회를 가졌고, 6월에는 ≪조선 미술 대요≫를 출간했다. 그리고 연이어 <고미술 계몽의 의의>, <국전의 인상>, <신사실파의 미>를 발표하는 등 전통 미술과 현대 미술뿐만 아니라 국전이라는 새로운 전시 체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드러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김용준은 석 달 후인 1950년 9월에 부인 진숙경과 딸 석란을 데리고 월북했다. 월북하자마자 그는 평양미술대학 교수에 취임했으며, 1951년에는 조선 미술가 동맹 조선화 분과 위원장과 조선 건축가 동맹 중앙위원을 지냈다. 1953에는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사퇴하고 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취임했다. 이 무렵 미술사 관련 논문을 다수 발표하는 등 미술사학자로 활약했다. 1956년부터 고구려 고분 벽화 현지 조사 및 문헌 연구를 시작했고, 1957년 과학원 창립 5주년 기념 학술 보고회에서 이 연구를 발표해 조선 미술사학의 수준을 높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같은 해 소련에서 개최된 ‘세계 청년 학생 축전’에 수묵 채색화 <춤>을 출품해서 금메달을 수상했는데, 조선화의 고전으로 평가되었다. 1958년에 연구서 ≪고구려 고분 벽화 연구≫를 출간했다. 1962년에는 평양미술대학 예술학 부교수로 복직해 <조선화의 채색법> 등을 발표했고, ≪조선미술사≫와 ≪단원 김홍도≫를 출간하는 등 월북 이후에도 전통 미술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1967년 향년 64세로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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