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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출판인이 말하는 나의 이 책
한국문학의 최전선에서 2020년을 함께한 출판 편집인, 마케터에게 물었습니다.
김혜진 『9번의 일』
읽지 말았어야 할 책이다. 읽는 내내 서서히 일에 질식되어 무너지는 '9번'의 모습에 속이 거북해져 덮었다 다시 펴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이 책을 떠올린 건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짊어지고 있는 과제가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는가'가 아닌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가'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작품이기 때문이다. 올 한 해가 유독 빨리 가버린 느낌이 든다. 이렇게 마흔 번 정도만 돌면 인생이 끝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니 새삼 시간의 유한함에 조급해진다. '나는 얼마나 더 견뎌낼 수 있을까?' 한동안 이 생각에 매몰되어 있을 것 같다.
추천인 : 김진겸
은행나무 마케팅팀

임경선 『가만히 부르는 이름』
천천히 나를 다독이고 타이르면서 만든 책이다. 책이 나온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막내 시절에 ‘태도에 관하여’의 편집을 도왔는데, 몇 해가 흘러 작가님의 소설을 맡게 되어 얼떨떨하면서도 기뻤다. 모두가 그랬겠지만 나에게도 여러 모로 힘든 한 해였다. 입동이 지났고, 겨울이 시작되었고, 곧 힘들었던 올해의 통점 위로 첫 눈이 내릴 것이다. ‘가만히 부르는 이름’이 그려내는 고운 진심들이 모두의 마음을 정결하고 맑게 감싸 안아주길 기도한다.
추천인 : 김준섭
한겨레출판 문학팀
김숨 『떠도는 땅』
봄이었다. 『Axt』에 연재되었던 『떠도는 땅』이 2년 6개월간의 개고를 거쳐 다시 편집부로 들어온, 내 책상 위에 놓인 교정지를 마주했던 계절. 추위가 조금씩 풀리고 마음도 녹는 3월, 그렇게 마주한 원고를 붙들고 있던 두 달 동안 매일 연해주 일대와 열악한 열차 안을 망연히 떠돌았던 것 같다. 뿌리내릴 땅을 애타게 갈망했지만 끝내 빼앗기고 그 땅 위에 하염없이 부유하는 사람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그들의 목소리가 마치 노래하듯 이어지고, 빛이 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들이 속주머니에 채운 씨앗처럼 희망은 발아한다. 책 출간 직후 '읽는 이의 마음에 자국을 남기는 작가'라는 표현을 자주 썼는데, 내게 김숨 작가님은 정말로 그런 작가다. 독자의 마음에 아주 오래 남을 자국을 남기고, 그 자국을 끝까지 붙들고, 간직하고,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작가. 돌이켜보니 봄을 통과해 나온 책이다. 그들이 당도한 땅에도, 그리고 우리가 당도할 땅에도 끝내 봄이 오길.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닿아 홀연한 마음의 자국을 남기길 바라본다.

추천인 : 김서해
은행나무, 국내문학/Axt 팀
윤이형 『붕대감기』
원고를 받아 들어 읽어 내려가던 순간 받았던 위로가 아직도 따스하게 남아 있다. 우리 모두가 아프다는 자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자신의 고통을 비교하며 위안받는 인물들과 “꿈에도 서로를 사랑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인물들의 이어짐을 통해 따뜻한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소설이다. 제목처럼, 하얀 붕대가 우리 모두를 치유하면서도 연결하는 듯이 느껴지고 이러한 감정은 우리가 항상 고파왔던 것이기에 더 소중하기도 하다. 힘겨웠던 2020년의 끝에서 이 소설이 우리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그리고 다른 위안이 필요한 이에게 연결될 수 있는 한 줄의 붕대가 되었으면 한다.
추천인 : 김미래
작가정신 단행본팀
김홍 『스모킹 오레오』
활달하고 신선한 화법, 풍부한 디테일로 무장한 재미와 사유가 있는 소설이다.
시종일관 유쾌한 화법과 담대하고 흥미진진한 상상력이 소설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데 그 스케일은 가히 압도적이다.
장마다 도드라지는 인물들. 각자의 시점에서 겪는 사건들은 생생하다. 그 시시각각이 모여 서사가 촘촘히 빚어진다.
한편 사건은 동시다발적으로 휘몰아치는 창의성은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했다.
추천인 : 최금순
자음과모음 마케팅팀
김남숙 『아이젠』
남숙이의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남숙이를 나 혼자만 좋아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남숙이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었다. 남숙이는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썼는데 그 모든 이야기가 나한테만 말해주는 비밀 같았으니까. 너한테만 말해주는 거야, 라고 음험하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남숙이. 그래서 남숙이 소설 속의 이상하고 추하고 슬픈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남숙아 난 네가 좋아. 우린 좀 뭐가 비슷하잖아.’ 내가 그러면 ‘아니 난 너랑 하나도 안 비슷해. 같다고 말하지 마.’ 악을 쓸 것 같은 남숙이. 그렇게 나에게, 너에게, 이 삶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이상하게 나를 외롭게 만들 것 같지는 않은 남숙이의 소설들.
추천인 : 신소윤
동아시아(허블)
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
한국 SF의 시작과 끝. 2004년 데뷔 이래 한국 SF 역사의 가장 앞선 자리에, 그리고 가장 마지막 자리에 모두 이름을 올리며 그가 가는 길이 한국 SF의 역사가 되고 있는 작가, 김보영의 10년 만의 신작 소설집. 《멀리 가는 이야기》, 《진화신화》로 한국 창작 SF사의 한 획을 그었던 작가가 들려주는 같은 듯 다른, 다른 듯 닮은 “소수성의 평범함에 대한” 열 개의 이야기들.
추천인 : 최재천
아작 편집장
황정은 『연년세세』
『연년세세』는 '가족 이야기‘인 것도 맞고, ’여성 이야기‘인 것도 맞지만, 가장 정확히는 '한국 이야기’다. 삼대에 걸친 가계가 등장해 ‘한국’의 근현대사가 전부 다뤄지고, 여성의 목소리로 서술돼 ‘한국’의 고통과 몸에 좀 더 가까워진다. 그리하여 지난 몇 십년간 몸 없이 살아온 ‘한국’에게, 우리가 만져줄 수 있고, 안아줄 수 있는 몸을 『연년세세』는 내어준다. 그렇게 우리는 『연년세세』를 읽음으로써, ‘한국’과 포옹하게 되고, 도리어 우리 자신이 위로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
추천인 : 김학제
동아시아(허블)
박선우 『우리는 같은 곳에서』
문단과 독자의 기대와 주목을 한껏 받아온 놀라운 신예, 박선우의 첫 소설집. 그는 사랑의 작가다. 섬세하고도 용감하게 사랑에 대해서 쓴다. 그 형형색색의 감정을, 망설이다가도 열망에 찬 감정의 미세한 결을, 이윽고 그 모든 것들이 초래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능란하고 절묘하게 그려낸다. 이 가을의 빛 같은 소설, 『우리는 같은 곳에서』에 대해 최근에(2020.7.8.) 달린 초록비님의 100자평은 이렇다. “이렇게 애틋한 한국어에 대한 감각을 한꺼번에 남김없이 되살려주는 때가 있어 한국 소설 읽기가 포기가 안 된”다고. “책이 끝나는 것이 아쉬워 일부러 천천히 쉬엄쉬엄 읽었”다고. “널리 소문 나면 좋겠다.”
추천인 : 안태운
자음과모음 문학편집팀
김이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은 김이설 작가의 변화구로 읽혔다. 소설은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왔던 ‘김이설’이란 작가의 작품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성을 보여준다. 그 모습이 조금 낯설고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소설 속 주인공이 가려는 ‘새로운’ 길을 기꺼이 응원하고 싶다. 가족이라는 족쇄에 발이 묶인 한 여성의 고통스러운 삶은 마음을 답답하게 하지만, 이내 그 족쇄를 끊어내려고 노력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이라는 희망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필사의 밤’을 보내는 이들에게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이라는 작가의 다정한 용기가 전해지기를 바란다.
추천인 : 정지수
작가정신 홍보팀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불안과 혼란으로 이렇게 시끄러웠던 해가 있었을까? 매해 충격적인 사건이 끊이지 않았지만 2020년처럼 세계가 뒤바뀌는 순간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해는 없었던 것 같다. 처음 느끼는 두려움들이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무엇보다 가만히, 고요히 있고 싶었다. 더는 흔들리지 않고. 김연수의 소설에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85쪽) 같은 문장을 발견할 때 힘을 얻었고, "그때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따뜻한 것들로, 좋아하는 것들로, 다정한 것들로."(185쪽) 같은 문장을 읽을 때 안도했다. 아직 아름다운 것이 많은 시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설 속, 흰 눈이 폭폭 쌓인 어두운 밤 기행이 양 한 마리를 안는 모습을 종종 떠올렸다. 그 장면은 올해 내내 위로가 되어 주었다. 2020년에 본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추천인 : 김화진
민음사 한국문학팀
이주혜 『자두』
시혜적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여자, 아내, 며느리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여자 은아. 은아와 대치되는 삶이지만 사회가 짊어놓은 약자의 위치에서 살아가는 영옥. 그 둘의 만남은 은아의 시아버지 병상에서 시작되고 대립하며 끝내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은 작가의 번역으로 한국에 나온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와 함께 보면 더욱 좋다. 덧, 홀로서기를 선택한 은아 씨와 영옥 씨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추천인 : 김아린
아작 기획이사
손원평 『프리즘』
<프리즘> 속 사랑은 프리즘을 통해 여러 색깔로 뻗어나가는 빛처럼 모든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거나, 기대하거나, 실망하거나, 후회하는 모든 감정 속에 사랑이 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자기 자신이 확장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소설 속 주인공을 보면서 "나중에 밥 한 번 먹자"라는 기약 없는 약속으로 넘긴 많은 마음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마음을 아끼지 말자.'라는 작가의 말처럼 어느 때보다 사랑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읽어보면 좋은 소설이다.
추천인 : 박신영
한겨레출판 마케팅팀
오은경 『한 사람의 불확실』
오은경 시인의 첫 시집 『한 사람의 불확실』은 대개 확실하게 말하기 어려운 것들(나 혹은 당신은 지금 기쁘다, 혹은 슬프다…)에 대해서는 간단히 말해 버리고, 보통은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끈질기게 써 내려갑니다. 시집 속 화자들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내게도 역시 별일이 아닌 것 같고 그들이 불확실하다고 느끼며 걷는 길 위, 맺는 관계, 속한 시간과 공간 같은 것들이 새롭게 중요해져, 읽기 전과는 다른 고민과 감각들이 가능해집니다. 시집을 읽고 난 뒤 각자의 세상에 새롭게 떠오른 불확실들을 마주하는 것 역시 즐겁습니다.
추천인 : 정기현
민음사 한국문학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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