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본미술 순례 1 』속에서
19쪽
불행에 불행을 거듭한 끝에 죽어 갔으면서 어째서 이 남자는 미칠 듯 노여워하지도, 울부짖지도 않고 이렇게 달관한 듯 고요한 표정일 수 있는가?
37쪽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 서양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신사조와 신문화의 빛을 탐닉하듯 쬘 수밖에 없었던 화가. 단 한 번, 온몸이 불타오르는 사랑에 빠졌지만 이 역시 허무하게 잃었고, 인생의 막바지에 해골을 품고 있는 자기 자신을 남기고 떠났다.
47쪽
사에키의 아내 요네코의 회상에 따르면, 모델료를 받고 떠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슬픈 일은 하나가 생겨나면 꼭 두셋이 겹치며 뒤따르는 법이죠." 사에키가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한 날은 그때로부터 5개월 남짓 지난 8월 17일이었다.
97쪽
특히 '일본화'로 대표되는 전통 예술과는 일단 분리되어 '서양화'라는 새로운 범주 안에서 제작에 몰두했던 예술가에게는 "대체 서양화란 무엇인가? 그래서 무엇을 그려 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었을 터다.
113쪽
어느 날 모임에서 화가 후루사와 이와미가 “요즘은 군부에 협력해서라도 살아남아야만 해.”라고 말했을 때, 아이미쓰는 히로시마 사투리로 “아무리 그리 말해도 나는 전쟁화는 못 그려, 어쩌면 좋지?”라고 울먹였다고 한다.
184쪽
규슈 구마모토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 두 개의 ‘조국’을 가졌고 그 두 조국이 전쟁을 벌였던 기구한 운명에 사로잡혔던 사람. 그리고 1920~1930년대 미국에서 등장했던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했던 노다 히데오가 ‘아슬아슬한 반전평화운동’에 투신했다고 해서 그것이 화가의 길에서 ‘일탈’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