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 이상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훌륭한 사람과 보통 사람도 부자와 가난뱅이도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도 필요한 사람과 필요 없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의 적성은 무엇인지, 자신의 재능은 어디에 있는지, 그런 것을 알기 위한 중요한 무기가 호기심입니다. 호기심을 잃어버리게 되면 세계를 알고자 하는 에너지도 함께 잃어버립니다. 이 책에는 지금의 호기심을 장래의 직업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선택의 가능성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열세 살은 '나는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묻기 시작하는 나이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수백 가지의 직업에서 호기심의 대상을 찾아보세요. 당신이 찾은 호기심의 대상은 언젠가 구체적인 직업으로 연결되고, 끝없이 넓은 세계로의 입구가 되어줄 것입니다.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내게 상처를 준 선생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소수의 예외적인 선생을 제외하고, 그들은 정말로 소중한 것을 내게서 빼앗아가버렸다. 그들은 인간을 가축으로 개조하는 일을 질리지도 않게 열심히 수행하는 ‘지겨움’의 상징이었다.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싸움이다. 나는 그 싸움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지겨운 사람들에게 나의 웃음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싸움을, 나는 죽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이다. 나는 고교시절 나에게 상처를 준 선생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소수의 예외적인 선생을 제외하고, 그들은 정말로 소중한 것을 나에게서 빼앗아 가버렸다. 그들은 인간을 가축으로 개조하는 일을 질리지도 않게 열심히 수행하는 '지겨움' 의 상징이었다.
그런 상황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어느 시대건, 권력의 앞잡이는 힘이 세다. 그들을 두들겨 패보아야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 쪽이다.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이 책의 주인공이 보여 주는 것과 같은 싸움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지겨운 사람들에게 나의 웃음 소리를 들려 주기 위한 그 싸움을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내게 상처를 준 선생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소수의 예외적인 선생을 제외하고, 그들은 정말로 소중한 것을 내게서 빼앗아가버렸다. 그들은 인간을 가축으로 개조하는 일을 질리지도 않게 열심히 수행하는 ‘지겨움’의 상징이었다.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싸움이다. 나는 그 싸움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지겨운 사람들에게 나의 웃음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싸움을, 나는 죽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제 사회의 절망과 퇴폐를 그리는 것은 너무 진부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아주 잠깐만 발걸음을 옮기면 우리는 어디서나 그들을 만날 수 있다. 모두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노력했던 과거에는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드러내는 것이 문학의 사명이었다. 근대화의 물결로부터 밀려났거나 홀로 남겨진 사람, 그리고 변화를 거부하거나 휩쓸린 사람들은 고스란히 작품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단편집을 통해서 나는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다른 희망을 가졌음을 보여 주고 싶었다. 사회 전체의 희망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개인적인 희망을!
그러나 세상은 달라졌다. 예를 들어 '남들과 비슷한 정도의 삶'이라는 말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지만, 현재의 '남들과 비슷한 정도의 삶'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하는지 종잡을 수조차 없을 만큼 광범위해져 버렸다. 이 책은 그런 차이에 관해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차이를 말하면서 위기감이나 어떤 불안을 조장하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다. 현대 일본의 '차이를 동반한 당양성' 중에서 특히 연애의 가능성에 관해 쓴 것이다.
이 소설의 모티브 중 하나가 '남성의 라이프스타일'이다. 거품이 꺼진 후 내내 경제가 밑바닥을 헤매고 있지만,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것이 거품이 꺼지기 이전의 사회 시스템과 사회적 통념의 은덕을 입어온 일본의 일반적인 나멍들이다. 종신고용, 연공서열이라는 제도에 의존해 기업의보호를 받으며 수입과 안정을 얻어왔던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Low Risk High Return)의 삶이 위태로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새로운 인생을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주인공인 '죽은 자'는 남성 중심사회에 들러붙어 목숨을 이어왔던 수많은 남자의 상징이기도 하다.
나는 뭔가 오물처리 같은 일을 혼자서 떠맡은 듯한 기분이 든다. 지독한 퇴폐가 진행되고 있고, 그 가운데에 풍요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균실 속에서 생물이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는듯 하다. 그 지긋지긋하지만 멈추지 않는 붕괴는 한층 그 속도를 높여간다. 그리고 반동화와 퇴행은 깊어진다고 생각된다.
이 소설을 쓴 최대 동기는 근미래에 있어 최악의 일본을 시뮬레이션 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현실의 정치.외교.국가전략 등을 검증하거나 비판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1년 반의 집필을 통해 끊임없이 '타인'과의 교섭.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궁리해 왔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앞으로 정치적.경제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든 간에, 정부나 국민에게 있어서 '타인'에 대해 신중하고 끈기 있는 교섭.커뮤니케이션이 필수적인 것이 되리라는 예감이 <반도에서 나가라>의 최대 동기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이 작품에는 많은 자극적 장면이 있기 때문에 모험 활극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등장인물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으면 한다. 정치나 국가라는 개념 속에는 처음부터 소수자(minority)를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장치가 들어가 있다는 잔혹한 사실과 누구라도 소수자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소수자의 자유가 인간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러한 것들을 독자들이 읽어내 주기를 바란다.
이 소설을 쓴 최대 동기는 근미래에 있어 최악의 일본을 시뮬레이션 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현실의 정치.외교.국가전략 등을 검증하거나 비판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1년 반의 집필을 통해 끊임없이 '타인'과의 교섭.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궁리해 왔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앞으로 정치적.경제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든 간에, 정부나 국민에게 있어서 '타인'에 대해 신중하고 끈기 있는 교섭.커뮤니케이션이 필수적인 것이 되리라는 예감이 <반도에서 나가라>의 최대 동기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이 작품에는 많은 자극적 장면이 있기 때문에 모험 활극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등장인물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으면 한다. 정치나 국가라는 개념 속에는 처음부터 소수자(minority)를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장치가 들어가 있다는 잔혹한 사실과 누구라도 소수자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소수자의 자유가 인간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러한 것들을 독자들이 읽어내 주기를 바란다.
이 소설을 쓴 최대 동기는 근미래에 있어 최악의 일본을 시뮬레이션 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현실의 정치.외교.국가전략 등을 검증하거나 비판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1년 반의 집필을 통해 끊임없이 '타인'과의 교섭.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궁리해 왔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앞으로 정치적.경제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든 간에, 정부나 국민에게 있어서 '타인'에 대해 신중하고 끈기 있는 교섭.커뮤니케이션이 필수적인 것이 되리라는 예감이 <반도에서 나가라>의 최대 동기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이 작품에는 많은 자극적 장면이 있기 때문에 모험 활극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등장인물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으면 한다. 정치나 국가라는 개념 속에는 처음부터 소수자(minority)를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장치가 들어가 있다는 잔혹한 사실과 누구라도 소수자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소수자의 자유가 인간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러한 것들을 독자들이 읽어내 주기를 바란다.
<사랑에 대한 달콤한 거짓말들>(원제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연애>이다)이라는 제목을 '여러 사람이 모여 서로 화답'하는 연가(連歌)에 비한다면 이는 윗구절이고, 실은 그 뒤에 '그런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하는 문장이 아랫 구절로 이어진다. 연애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연애라는 게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하는 의문도 이 제목에는 포함되어 있다.
말할 것도 엇이 연애는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경제 활동의 시스템이 변해 가고 있으며, 그에 따라 개인 대 개인, 혹은 개인 대 공동체의 커뮤니케이션 양식도 변화하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인 연애의 존재 양식도 변할지 모른다. 이 책은 그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 쓴 것이다.(저자 서문에서)
문득 고개를 돌리면 옆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 또는 음악을 발견할 때가 있다.
나에게 있어서의 재즈란 그런 것이다.
재즈는 상냥하다.
오랫동안 내버려두어도 언제나 나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나를 만나주는 여잧럼 상냥ㅎ다.
특히 재즈 스탠더드 넘버는...
"저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재즈에서 이렇듯이 단순한 따뜻함을 느껴왔었다. 쓸 필요도 없겠지만 그것은 단순함이 아니라 강함이다.
'차이'라는 말은 그리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마치 인격에 차이가 있다, 혹은 인간으로서의 격에 차이가 있다는 듯한 부정적 뉘앙스가 풍겨 나온다. 지금은 종신고용제가 붕괴되고 있고 또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세상의 기준'이라는 것도 사라지고 있다.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따뜻한 보호를 받는 일로(감시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다소 빈부 차이는 있어도 대부분 거기서 거기로, 비슷한 동질성'이라고 하는 일체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졌다. 예를 들어 '남들과 비슷한 정도의 삶'이라는 말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지만, 현제의 '남들과 비슷한 정도의 삶'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하는지 종잡을 수조차 없을 만큼 광범위해져 버렸다.
이 책은 그런 차이에 관해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차이를 말하면서 위기감이나 어떤 불안을 조장하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다. 현대 일본의 '차이를 동반한 다양성' 중에서, 특히 연애의 가능성에 관해 쓴 것이다.
나의 독자가 만든 인터넷 사이트 '용성감모'의 게시판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교육 개혁 방법은?"이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정답자에게는 경품을 준다는 카피도 넣어서 독자의 흥미를 끌어보았지만, 애석하게도 정답자는 없었다.
내가 준비한 대답은, 지금 당장 수십만이 집단 등교거부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대답이 어디 있느냐는 항의가 게시판을 가득 채워 수습이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다. (...)
"그게 뭐야. 세상에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라고 사람들은 비판했다. 그래서 나는 중학생의 집단 등교거부를 모티프로 소설을 쓰기로 했다.
교정을 보면서, 내가 쓴 소설이지만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왜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가진 정보와 이야기가 잘 조화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파멸적인 스토리다. 자기와 맞서는 여행, 그것을 실천한 여성의 이야기다. 자기와 맞서는 것은 위험한 행위다. 마약이나 종교, 예술, 섹스는(그리고 환영조차도), 자기와 맞서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존재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런 식의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내부에 혼란 그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부와 외부라는 말은 이미 거짓말이다. 존재하는 것은 관계성뿐, 나머지는 모두 분별이 없는 표면뿐이다.
'이비사'는 파멸적이지만 전혀 어둡지 않다. 이 소설의 주인공 마치코는 자기와 맞서면서도,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항상 살아가기 위한 가능성을 무의식 중에 찾고 있다. 타이틀이 되어 있는 '이비사'는 스페인에 있는 작은 섬의 이름이지만 이비사 섬으로 가보아야 당신은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 이비사란 무엇인가? 그 답은 이 소설 안에 있다.
"이 나라에는 뭐든 다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만은 없습니다."
중학생이 그런 말을 하는 소설을 쓴 이후로, 희망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회의 절망이나 퇴폐를 그리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아주 간단하다. 모든 장소에 절망과 퇴폐가 넘쳐나고 있다. 강력하게 근대화를 추진하던 시절에는 그런 부정적인 측면을 그리는 것이 문학의 사명이었다. 근대화의 그늘에서 차별받는 사람들이나 소외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근대화를 거부하는 사람 등을 일본문학은 그려왔다. 근대화가 종언을 고한 지 오래된 지금, 그런 방법론이나 그런 테마의 소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이 단편집에서는 등장인물들만의 고유한 희망을 담고 싶었다. 사회적인 희망이 아니다.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개별적인 희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