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로의 이주라는 인류의 꿈과 한계
인간이 지구를 떠나 화성에 식민지를 건설해도 되는 걸까? 애초에 지구를 떠나야 할 이유가 있을까? 사이비 우주 장사꾼들에게 보내는 천체물리학자의 ‘진짜 우주’ 이야기.
2024 뉴베리 대상 수상작
세상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없다면, 어떻게 ‘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꿀, 자유로운 개 요하네스의 아름다운 자아 찾기 여정.
나만의 공간 탐색기 집은 우리 삶의 모양만큼 다양해져야 한다. 특별한 집은 발굴하고 취재하는 부동산 큐레이터와 함께 고유함으로 삶을 바꾸는 집을 만나본다.
나는 왜 그 곡에 꽂혔을까?
진정성, 사실성, 참신성, 멜로디, 가사, 리듬, 음색…. 분명 내 음악 취향이 있는데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던 이들을 위한 안내서.
판타지 장르를 쓰는 웹소설 작가로 데뷔한 지가 몇 년이 지난 현재,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체된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더 이상 데뷔할 때처럼 신선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도 않고, 늘 비슷한 이야기들만 복제해내는 듯한 느낌.익숙한 클리셰에만 갇혀서 찍어내는 듯한 글만 쓰게 되고, 그러다보니 예전만큼의 즐거움은 잊혀진지가 오래였다.그러던 중 이벤트를 통해 <판타지설계노트>를 읽게 되었는데, 아직 3장까지 밖에 읽지 못했지만 앞부분을 읽으면서 초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그리고 인문학적인 관점을 통해 판타지에 대한 흥미로운 지식들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판타지라는 장르의 근본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그럼 내가 읽었던 부분 중 흥미로웠던 부분 몇 가지에 대해 소개하겠다.-톨킨의 정의: 1차세계와 2차세계, 그 사이의 스펙트럼(중첩세계와 이세계)-공간: 지도의 중요성(기존 지구의 일부를 합쳐서 새로운 세계의 지도를 만들기)-기후에 따른 세력의 배치(기후대 별 문명의 발달, 종족의 특징 등)-세계설계의 중요성, 소홀한 세계설계는 설정오류를 만든다이 외에도 앞으로 기대되는 파트가 있다면 '제 5장, 현실적 세계에 마법 얹기'와 '제 7장, 판타지 세계의 이종족과 거주지'이다.또한 내가 판타지 작가로 지내오면서 공감가는 문장들도 있어, 아래에 인용 해본다."강력한 이야기는 다수가 이야기를 읽도록 하지만, 강력한 세계설계는 팬들이 그들의 성역에서 새로운 디테일을 발굴하기 위해 그 세계를 방문하고 또 다시 방문하게 한다""판타지 세계의 디테일이 탄탄해야 이야기에 깊이가 더해지지만, 그 디테일을 자연스럽게 보여주지 않고 마구 드러낸다면 오히려 이야기를 해칠 수 있다"위 문장들을 통해 세계설계의 디테일을 어떻게 잡아야하는지, 그 감각을 익힐 수 있어서 좋았고 문장을 읽는 순간 바로 마음 깊이 와닿았다.마지막으로 이 책은 문장이 친절하게 쓰여져 있어,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꽤 쉽게 읽힌다는 점, 그리고 카테고리가 상세하면서도 깔끔하게 잘 나누어져있어 꼭 순서대로 읽지 않더라도 카테고리에 따라 본인에게 필요한 부분들만 골라 읽어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인 것 같다.다만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책의 극초반 부분에서 짧게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을 쓸데없이 길게, 반복적인 문장으로 써서 도입부가 조금 지루했다는 것과 양이 방대하다보니 완독을 하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이다.또한 지망생들에게는 가이드로서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데뷔를 한 작가가 읽기에는 앞부분이 조금 뻔한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물론 뒷부분으로 가면 기성 작가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juhi2518님친애한다는 표현이 주는 어감은 이상하게 이중적이다.모순적 의미가 이미 포함되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직관적으로 든다. 사람이 가지는 다양한 감정 중 복합적인 측면 중 하나가 이중적인 감정, 예컨데 증오하면서도 사랑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하고, 우울하면서도 은근히 이를 즐기는 감정까지.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사실상 주인공은 친애하는 사람이 없다. 아니, 어쩌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친애받을 수 없다. 이 점에서 보면 '친애'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주인공의 감정은 이중적이기 않기 때문이다. 반어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반어적으로 '애써' 표현한 이유는 뭘까? 이는 주인공이 자기 스스로에게 가지는 감정이 이중적여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즉, 용서해야 한다는 것과 증오한다는 사실에서 본인 스스로가 가지는 혼란이다.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유가 어찌되었건, 과거의 증오했던, 그리고 지금도 증오하는 친구들을 친애하여(물론 실제로는 거리가 멀지만)자기 스스로가 구원받고자 하는 양가감정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에게 상처준 이에게 반대로 얼마만큼의 상처를 되돌려주는 것이 가능하며, 그 총량은 정확히 내가 받은 고통에 비례할 수 있는 것일까? 없다면, 그래서 내가 오히려 더 큰 고통을 그들에게 준다면, 나는 그들과 다른가?
알수없는사람님세이노(SayNo) 지음
바늘이야기 김대리 지음
박용우 지음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유진 피터슨 지음, 김순현 외 옮김, 김회권 외 감수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