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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계'에 속하게 된다. 가족, 친구 혹은 어떤 조직 속에서 자신이 규정되고(혹은 규정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맺기가 늘 상호적이며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엘프리데 옐리네크의「피아노 치는 여자」는 모녀 관계를 중심으로 이러한 인간관계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소설 속의 어머니와 딸의 모습은 전통적인 모녀 관계의 틀을 저만치 벗어나 있다. 피아노 교사인 딸 에리카는 어머니를 위해 돈을 벌어다 주고 어머니와 같은 침대를 쓰는 동거자이다. 어머니에게 있어 에리카는 딸로서의 역할보다는 고립감과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줄 남성의 대리적 역할을 담당하는 존재이다. 딸의 부재는 앞으로 자신이 처하게 될 모든 문제의 근원이므로 어머니는 주변과의 관계차단을 통해 에리카를 고립시키고 결국 이러한 종속적 관계 속에서 에리카의 여성성은 자해, 도벽, 관음증 등 뒤틀린 형태로 나타난다.
이에 에리카는 제자 클레머와의 관계맺기를 통해 어머니의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나 클레머에게 있어 에리카는 성적 대상, 물화된 존재로서의 의미만 있다. 작가는 이 둘의 관계 속에서 남·녀의 권력문제를 말하려는 듯 하다. 두 사람의 매개는 성행위로 처음 주도권은 연장자인 에리카에게 있었고 클레머는 그녀의 지시에 따라 성행위를 제어당하고 강요당하게 된다.
이러한 수동적 관계에 대해 그는 남성으로서 모멸감을 느끼고 억제된 자신의 남성성을 에리카에 대한 폭력적 행위로 폭발시키는데, 클레머의 에리카에 대한 육체적 학대와 존재 거부는 그녀의 여성적 자아를 다시 한번 붕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의(남녀간의) 권력관계는 결국 여성의 주도성을 참지 못한 남성 우월주의의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 결국 에리카를 붕괴시키는 원인이 된다.
에리카는 어머니의 세계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마찬가지로 남성의 폭력에 짓밟히고 그 모든 관계 맺기에서 실패하고 만다. 그녀는 전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혼자로, 고립된 상태로 되돌아간다. 에리카가 마지막에 집으로 돌아가는 건 결국 어머니로 대표되는 억압적인 세계로의 회귀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전통적인 '모성'에 대한 신화 파괴와 억압적인 가부장적 질서에 대해 폭로하고 있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어머니를 굳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어머니로 대표되지만 사실 그 '누구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니까. 억압적 관계라는 건 외면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억압받는 이의 행동, 생각까지도 미리 제어한다는 점에서 또한 내면적인 문제이다. 상대방에게 종속됨을 느꼈다면 이미 주체로서의 자아는 거부당한 채 상대방의 틀에 맞춰지는 것이다.
에리카는 이러한 종속적 관계의 비극을, 그리고 모든 관계에서 소외된 존재를 대표한다. 소설 속에서 반복되는 주인공의 새디즘·마조히즘적 성향과 비정상적 인간관계는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결코 쉽게 책을 놓을 수 없는 건 '관계맺음'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자세 때문일 것이다.
집으로 돌아간 후에 그녀는 다시 어머니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작가는 열린 결말을 통해 독자에게 어떠한 희망이나 절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머니와의 섣부른 화해도 근거 없는 낙관도 존재하지 않는 소설의 결말 속에서 우리는 일상의 인간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된다. - 임세미(2000-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