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건네는 사람은 줄리언 반스, 혹은 그를 연상시키는 노년의 소설가다. 관리 가능하지만 완치는 불가능한 혈액암과 함께 살아가는 그에게는 두 명의 친구가 있다. 스티븐과 진. 옥스퍼드 재학 시절 만나 그의 소개로 서로를 알게 되었고, 사랑하고, 헤어졌던 두 남녀. 소설가는 40여 년 뒤 우연히 다시 닿은 인연으로 또 한 번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고, 그들은 다시 한번 서로를 사랑하고, 끝내 헤어졌다.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남자와 사랑할 수 없는데 사랑으로 받아들여지는 여자. 둘의 관계가 다시 시작될 때쯤 소설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고 두 사람에게 맹세했다. 관계를 둘러싼 어긋난 기억, 그리고 끝내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진실. “나는 아무도 내게 한 적이 없는 질문, 그리고 나 자신도 한 적이 없는 질문의 답 것 같아.”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순간, 소설가는 자신이 이야기를 쓰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부커상 수상 작가 줄리언 반스가 자신의 마지막 소설이라고 직접 언급한 작품. 반세기를 문학에 투신해 온 작가가 스스로의 끝을 의식하고 써 내려간 유언 혹은 문학적 부고. 화려한 결산이나 업적을 나열하는 대신 삶과 기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되물으며 독자 앞에 마지막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활동하는 동안 굳건하게 곁을 지켜준 독자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그 세월이 즐거웠다고 고백하는 작가. 소설은 어느 소도시의 카페 실외석에 마주 앉아 영국식 블랙 유머에 능한 지적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죽음을 직시하면서도 독자를 비탄에 빠지게 하지 않으며, 암과 죽음, 상실을 다루면서도 기이할 만큼 위로가 되는 이야기. 2022년부터 2025년까지 3년여에 걸쳐 써 내려간, 대가가 독자에게 직접 전하는 우아한 ‘떠남’의 고백이다.
- 소설 MD 박동명
이 책의 한 문장
그럼에도 오랜 세월 당신이 우리의 관계를 기쁘게 여겼기를 바란다. 나는 분명히 그랬다. 당신이 있어서 나는 즐거웠다. 사실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 팔에 잠깐 손을 얹었다가?아니, 당신은 계속 구경하고 있어라?나는 슬쩍 사라지겠다. 아니, 계속 구경하고 있어라.
쿵쿵쿵쿵. 온 집 안을 뛰어다니던 아이가 너무 신난 나머지 그만 두 발이 배배 꼬여 바닥에 머리를 꽈당 부딪힌다. 아이의 이마에 솟아오른 것은 다름 아닌 알. "어어, 알이잖아!" 그런데 과연 이 알에서는 무엇이 태어나는 걸까. 아이는 정체 모를 알을 부화시켜 보기로 하고 두툼한 '알 백과사전'을 꺼내와 책 속으로 쏙 다이빙한다.
알 백과사전의 책장에서 책장으로 점프할수록 수천 가지 알에 대한 설명이 줄줄 이어지고, 그 알들은 하나같이 아이 이마에 난 알과 비슷하게 생겼다. 점점 더 혼란스러워져 눈이 뱅글뱅글해진 아이는 일단 백과사전 밖으로 나온다. 그 순간 이마의 알에서 금이 가기 시작하며 알껍데기가 서서히 갈라진다. 도대체 그 알에서는 무엇이 태어났을까? 아름다운 색감과 톡톡 튀는 상상이 어찌나 귀여운지 그만 깨물어주고 싶어질 만큼 사랑스러운 그림책이다.
- 유아 MD 권벼리
책 속에서
어어, 이것 좀 봐요! 알껍데기가 갈라지고 있어요! 도대체 알에서 뭐가 나올까요? 여러분이 한번 맞혀 볼래요?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도진기의 추리소설. 판사로 20년을 보냈고, 2010년부터 추리소설가로 활동을 시작한 작가가 재판의 본질에 관한 추리소설을 차려놓았다.
선재의 약혼자 지훈은 친구 양길과 떠난 필리핀 여행에서 사망했다. 양길은 지훈의 사망보험금 19억의 유일한 수익자다. 검사는 살인으로 양길을 기소했고, 양길은 지훈의 죽음이 과음으로 인한 심장마비라고 주장한다. 평소 양길이 지훈을 이끄는 관계였다는 점, 사망한 지훈의 수입의 절반에 해당하는 보험금이 과도하다는 점, 이 여행을 양길이 일방적으로 계획했다는 점, 양길이 준비한 수면제가 지훈의 옷에서 검출된 점, 양길의 스마트폰에 수면제가 술에 녹는지 검색한 기록이 있다는 점 등의 정황 증거에도 불구, 1심 재판정은 양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일말의 의혹도 없는 확신에 도달할 만큼의 증거'(120쪽)를 요구하는 법정 앞에서 선재는 분노한다. 증거가 될 지훈의 사체는 양길에 의해 현지에서 화장처리 된 이후다.
2025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이 신뢰하는 국가기관 뒤에서 두번째가 법원이었다고 한다. '송사 세 번이면 묫자리도 판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재판은 인간을 소진시킨다. 법기술자의 논리를 죽은 자의 억울함으로 깨트리며 선재는 자신이 믿는 진실을 찾아 3심 이후의 재판을 시도한다. 범죄자의 논리를 깨트리는 잘 만들어진 법정 미스터리가 과녁을 명중할 때의 읽는 쾌감으로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 소설 MD 김효선
이 책의 한 문장
"제수씨도 이번에 봤잖습니까? 그 사람들, 피해자는 관심없어요. 재판은 법으로 하는 쇼라니까요. 그들만의 리그죠. 거기 상식이 어디 있습디까?"
자신만의 문장을 만들어내는 카피라이터 오하림이 일본 광고 카피 70개를 선별해 소개한다. 책을 펼치면 ‘도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간결한 구성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감각적으로 배치된 일본 광고 카피와 그에 대한 작가의 감상이 교차하며,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감정의 진폭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따뜻하면서도 세련되고, 정제되어 있으면서도 아날로그적인 결이 섬세하게 살아 있다.
광고 문구를 분석하거나 해부하려 들기보다, 한 문장을 오래 바라보는 독자의 자리에 서 있다는 점도 이 책의 미덕이다. 그래서 이 도감은 참고서라기보다 감상집에 가깝고, 배움보다는 여운을 남긴다. 일본 광고 특유의 여백과 온도를 오하림의 언어가 과하지 않게 덧대며, 문장이 만들어지는 순간의 공기를 조심스럽게 보존한다. 어수선해지기 쉬운 새해, 가만히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힘을 내보기를 권하는 사려 깊은 책이다.
- 에세이 MD 도란
이 책의 한 문장
"너무 좋아"는 재능입니다. (가도카와 신입 사원 모집 공고)
저는 어린 시절 무언가를 끝까지 좋아해본 사람이라면, 그만이 가지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상이 연인이든 아이돌이든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무치게 좋아한 경험이 있다면, 그 차제가 곧 스펙이라고 생각해요. (중략) 오래된 이메일에, 예전부터 쓰던 휴대전화 번호 뒷자리에, 사물함 비밀번호에 여전히 살아있지 않나요? 이름부터 생일까지, 그 시절 좋아했던 대상에 대한 흔적이요. 어린 날의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어딘가에 남아 우리를 지켜봐주고 있답니다. 지금, 당신의 '너무 좋아'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