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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저자 > 학습서/수험서

이름:오세영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 대한민국 전라남도 영광

최근작
2023년 9월 <77편, 그 사랑의 시>

77편, 그 사랑의 시

우리나라 고유어에는 ‘아름다움’의 반대말이 없다. ‘추醜’나 ‘미움’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전자는 한자어漢字語이고 후자는 ‘증오憎惡’라는 뜻을 지닌, 사랑의 반대말이지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아니다. 왜 그런 것일까. 하르트만의 미학에 의할 것 같으면 ‘추’도 ‘미’의 일부라 한다. 그는 미의 종류를 나누는 도식에 버젓이 ‘추’를 포함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이 세상에 ‘추’는 아예 없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모든 아름다움은 사랑을 낳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이란 자신에게 결여된 아름다움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어떤 갈망이라 하였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아름답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축복할 때 ‘잘 살라’고 말한다. 돈을 많이 벌라는 뜻인가. 높은 권세를 누리라는 뜻인가. 아니다. 아름답게 살라는 뜻이다. 2023년 7월 7일

가을 빗소리

앞에서 아른거리는 그것, 한 발짝 다가서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그것, 한 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서 아직 무어라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 그것을 붙잡으려고 나는 한 생애를 좇아 언어의 그물을 던졌다. 오오, 나의 하느님 그것은 끝내 환영幻影이었을까요? 내 서 있는 곳은 이제 황막한 사막. 2016년 초봄 안성의 농산재聾山齋에서

곡선은 직선보다 아름답다

언어는 불완전하다. 그러나 일개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그래도 자신의 뜻을 전달코자 한다면 언어 이외에 달리 어떤 방편이 있을 것인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니 그가 만든 언어 또한 불완전할 것은 필연이며, 언어가 불완전하니 어차피 온전하게 이 세계를 받아들이거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 또한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한 생, 언어에 매달려 사는 인간이란 얼마나 덧없고 허망한 존재일 것이랴.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를―감히 ‘진실’이나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까닭에 이 어휘를 차용한다 ―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독자들에게 참으로 많은 말들을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학술서 스물댓 권, 시집 삼십여 권을 통해 들려준 말들이 그것이다. 그래도 나는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제대로 다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허실 삼아 이 마지막 카드를 한 번 꺼내본다. 주관적 직설어법의 말들이다. 학문적인 글이 객관적 직설어법이라면, 소설은 객관적 간접어법, 수필은 주관적 직설어법, 시는 주관적 직관어법의 글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수필집을 통해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 할 수 없었던 말, 하려다가 실패했던 말을 내 나름의 이‘ 주관적 직설어법’으로 다시 해보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어차피 언어란 불완전한 표현수단인 것. 이 같은 내 존재의 몸부림을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주시기 바란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이 배로 함께 이승을 건너는 승선자(embarquement)들 아니겠는가.

꽃잎 우표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는 일상적 대화에서 대체로 말을 하는 쪽보다는 듣는 쪽이었다. 그것은 산문가라기보다는 시인의 편에 속하는 태도였다. 산문가는 말로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시인은 침묵으로 글을 쓰는 사람인 까닭이다... 아름다운 산문을 쓰고 싶었다. 시 같은 산문을 쓰고 싶었다. 그리하여 묶어본 것이 이 산문집이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산문은 되지 못하고 말았다. 아둔한 시인의 아둔한 산문이라고나 할까.

내가 사랑하는 섬

섬은 외롭습니다. 그러나 섬이 없는 바다는 더 황막하겠지요. 우리네 인생살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삶이 고해라면 따뜻한 인정은 그 바다에 버티고 선 일개 섬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엔 약 4천여 개의 섬이 있다고 합니다. 그 섬과 섬이 가슴을 열고 서로를 품을 수 있다면 삶은 얼마나 더 따뜻해질까요. 그래서 시인들은 섬을 노래합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요즘 우리 학계에는 사회가 그러하듯 편의주의가 만연해 있는 듯하다. 피상적, 화제적, 개연적인 이론만을 재빠르게, 파편적으로 응용하여 대중적 이슈를 만드는 것도 그 하나의 시류일 것이다. 학문적인 것보다는 비평적인 것이, 본격적인 것보다는 과시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보다는 감각적인 것이 자주 매스컴을 타고 대학에서조차 이를 묵시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현상은 이제 바로잡아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진실하게, 정직하게 꾸준하게 학문의 토대를 지키는 학자들의 소명이 아쉽기만 하다. 세월의 빠르기를 붙잡을 수는 없다. 학문의 발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직하다면 우직한 이 책이 문학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다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저자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바람의 그림자

잘 된 것이든 못 된 것이든, 그 과정이 괴로운 것이든 즐거운 것이든 한편의 시를 써놓고 느끼는 성취감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세속적 행복과 아무 관계가 없는─오히려 그로 인해서 때로 불행해질 수도 있는─시작(詩作)을 마치 상습 마약범처럼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 그런 것일까. 아마도 영원에 대한 체험 때문이리라. ‘영원’이라는 단어가 좀 당돌하다면 ‘영원성(永遠性)’이라는 말로 고쳐 불러도 상관없다. 시인은, 아니 최소한 나는 이 영원에 대한 동경 때문에 시를 쓴다. 시가 아니라면 이 세상 그 무슨 인간사에 영원이 있다는 말인가. 살아오는 동안 나는 아직 그 어떤 것의 실체에서도 영원성을 본 적이 없다. 일상인들이 행복의 본질이라 생각하는 권력과 부를 보라. 세속적인 일에 골몰하여 한 때 최고의 권력이나 재력를 누린 자들, 혹은 그 가족들의 말로가 웅변해주지 않던가. 현재는 덧없고 모든 인간사는 흘러 과거가 된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 부른다. 그리고 이미 역사가 된 것들은 그 되는 순간에─비록 하나의 기억으로 남아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남겨 줄지는 모르지만─그 자체 무로 돌아가 버린다. 그것은 현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임진왜란이, 세조의 왕위찬탈이 그 당대의 의미로 살아 어떻게 현재의 우리와 직접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시는 그렇지 않다. 소포클레스의 서정시들이, 신라의 향가들이, 황진이의 시조가 비록 몇 백 년 혹은 몇 천 년 전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에게 버젓이 살아 생생하게 말을 건네 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시는 영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시가 행위태(行爲態)가 아니라 존재태(存在態)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자연이 그러한 것과 같다. 그래도 우리가 이 지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영원은 자연뿐이 아니던가. 그런데 모든 존재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고서는 그 실체를 지닐 수 없다. 예컨대 자연은 신(神)이 만들며, 시(詩)는 그 자연을 모방해서 인간이 만든다. 헬라어로 시(poesis) 란 원래 무엇인가를 ‘만든다’의 뜻이다. 신이 만든 것이 자연, 인간이 ‘만든’ 것이 시(art=poesis)인 것이다. 태초에 신이 하늘을, 땅을, 산과 바다를 만들 듯이 나는 오늘도 무엇인가를 만들고자 한다. 만일 내가 만든 그것이 산이라면 백두산이 될지, 한라산이 될지, 아니 화산이나 민둥산이 될지 아직 모른다. 어떻든 나는 무엇인가를 만들며 그 만드는 행위 속에서 영원을 체험하고 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신이 그 마지막 날 행복감에 취하셨던 것처럼……그러므로 비유컨대 산을 만드는 자는 시인이지만 그 만들어진 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자들은 산문가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시인들 대부분 한 개의 산이라도 만들려 하지 않고 그 산에 대한 이야기로 꽃피우고자 한다. 존재를 지향하지 않고 행위를 지향하려 한다. 그것도,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취하려는 자세를 놓고 훌륭하고 훌륭하지 않음을 논하려 한다.

바람의 아들들

개를 좋아하면서도 외래종은 어쩐지 싫다. 개 같지가 않아서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이리라. 그래서 내가 키우는 개 두 마리는 모두 토종개들이다. 하나는 하얀 털의 진돗개, 다른 하나는 검은 털의 삽사리. 개를 기르면서 나는 개에게도 영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특히 그의 두 눈을 들여다 볼 경우가 그러하다. 언제인가 그를 홀로 집에 남겨 놓고 돌아 설 때였다. 나는 그의 눈동자에 원망과 슬픔의 감정이 설핏 스치는 것을 보았다. 그 이후부터 나는 그와 헤어지는 의식에서 결코 눈을 마주치지 않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개에게 영혼이 있다면 짐승으로서의 그의 외양外樣은 아마도 주술呪術에 걸린 어떤 가면假面일지 모른다. 아아, 그는 짐승의 탈을 쓴 인간일지도…… 그렇다면 인간 또한, ‘인간이라는 탈’을 쓴 짐승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내면엔 사실 수많은 짐승들이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백석白石의 시들을 특별히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 것은 분명 그의 남다른 혜안의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 거리에 영감들이 지나간다./ 영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쪽재비상을 하였다./ 개발코를 하였다. 안장코를 하였다. 질병코를 하였다./그 코에 모두 학실을 썼다./ 돋테 돋보기다. 대모테 돋보기다. 로이드 돋보기다./ 영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리며/ 투박한 북관北關말을 떠들어대며/ 쇠리쇠리한 저녁 해 속에/ 사나운 즘생같이들 사라졌다. '석양' 시란 무엇인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이 아니겠는가?

벼랑의 꿈

이순(耳順)이 멀지 않은 나이. 이제 생을 저만치 두고 관조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듯 홀로 가는 길이 다만 아름답기만 바랄 뿐이다.

별 밭의 파도 소리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말은 새나 짐승이나 꽃만이 하는 것은 아닌 것, 인간만이 하는 것은 더욱 아닌 것, 가만히 귀 기울이면 하늘도 땅도 물도 서로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통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닫힌 귀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꽃들의 귀는 정결한 이슬방울들이 연다. 구름의 귀는 정갈한 바람들이 연다. 강물도 누구나 만나는 이에게는 말을 건넨다. 자갈밭을 만나면 간지럽다 깔깔, 웅덩이를 만나면 심심하다 웅얼웅얼, 벼랑을 만나면 무섭다고 와와······. 갈잎 어지럽게 휘날리는 가을 저녁 강가에 나가 보아라. 여러분은 그때 수면에 동그란 파문을 일며 떨어지는 잎새 하나를 주워 들고 속삭이는 강물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꽃은 왜 피는 것인지, 꽃은 왜 지는 것인지, 한세상 지나면 우리 뜬구름으로 만나자는 말, 해는 왜 뜨는지, 해는 왜 지는지, 한 세월 지나거든 우리 흐르는 바람으로 만나자는 말, 이 슬픔 지나면 기쁨으로 만나자는 말.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모든 만남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속눈썹을 적시는 봄비나, 빈 어깨에 내리는 싸락눈이나, 발부리에 채여 나뒹구는 돌멩이나, 심지어 콧등을 무는 모기조차도 지금 내게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내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러나 사랑이 없는 자는 듣지도 못한다.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자. 꽃봉오리가 정갈한 이슬방울로 그 꽃잎들을 열듯, 구름이 청아한 솔바람으로 하늘 문을 열듯······. 저 소리를 들어 보아라. 어느 선사(禪師)가 그러했듯, 달빛이 눈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야반삼경에 대문의 빗장을 잡고 저 계곡에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들어 보아라. 바람 소리를 들어 보아라. 말은 새나 짐승이나 꽃만이 하는 것은 아닌 것, 인간만이 하는 것은 더욱 아닌 것, 가만히 귀 기울이면 하늘도, 땅도, 물도 서로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통하는 소리가 들린다. 성경에도 귀 있는 자 들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생이 빛나는 아침

대표작이라 하지만 나름대로 몇 가지 기준을 정했다. 첫째 길어도 17행 내외의 단시라는 점이다.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우리 시들이 쓸데없이 길어 미학적 긴장감이 사라지는 것을 감안한 결과다. 둘째 독자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들은 가능한 배제하였다. 시인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셋째 될 수 있으면 쉬운 시를 우선으로 하였다. 순수 독자들의 감성에 호소하려는 의도. 넷째 건강하고 메시지가 잘 전달되는 작품들을 골랐다. 아무리 논란이 되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우선은 독자들에게 이해되고 난 다음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시 쓰기의 발견

본서가 서점에서 자취를 감춘 뒤 많은 분들로부터 아쉽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그간 출판을 미룰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사정이 있었다. 이제 모두 여건이 성숙되어 다시 개정증보판을 내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2012년 초판이므로 무려 7년 만의 일이다. 긴 세월인데도 잊지않고 본서에 관심을 보여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초판본에 대해서는 그동안 애정 어린 평들이 있었다. 일일이 밝힐 필요는 없으나 정리하자면 대개 두 가지로 요약되는 견해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나는 이 분야의 다른 저서들에 비해 비교적 참신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용이 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때 필자로서는 그 같은 평에 대해 - 초판 당시의 흥분으로 - 어리둥절했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모두 옳은 지적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자랑 같지만 본서는 동종同種의 다른 저서들과 확실히 다른 패러다임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 내용이 다소 낯설었을 것이다. 본서가 난해해 보였던 것은 그 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우선 대중적이라기보다는 학술적이었다. 오랜 교수 생활로 체질화된 필자 자신의 글쓰기 습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수준이 대학원 문학 전공 학생들의 텍스트 차원이었다. 거기다가 본서에서 인용한, 생경한 외국 문학 이론과 전문 학술용어도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부끄러운 측면 또한 없지 않다. 후에 차분히 읽어보니 대부분 문장이 거칠고 난삽했다. 심지어 비문非文에 가까운 것도 적지 않았다. 필자로서는 그간 자신의 문장력에 다소의 자만심이 없지도 않았는데 참으로 낭패스러웠다. 왜 그리 되었을까 굳이 변명하자면 당시 필자는 본서 이외에도 다른 두 권의 학술 저서(<문학이란 무엇인가>(서정시학, 2013), <시론>(서정시학, 2013))를 간행 중이었는데 그 와중에 아마 정신적으로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어떻든 이상 고백한 제 문제들을 가능한 한 충실히 교정하여 거의 새로 집필하다시피 한 개정증보판을 내게 되었다. 독자 여러분들의 변함없는 사랑과 관심을 기대해 본다. 요즘 한국 시단은 참으로 혼란스러운 국면에 처해 있는 것 같다. 우선 시를 읽는 독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시인이 곧 독자들일 뿐이다. 대학에서도 시의 영역은 점점 위축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시로서 우리 시대의 인문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문명사적인 문제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시인 자신들의 책임 또한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혹시, 시가 무엇인지 모르고 아무렇게나 시를 쓰는 시인, 시적詩的 자살自殺을 감행함으로써 시단의 주목을 한 번 끌어보겠다는 시인, 상업적 목적으로 독자들을 속여 한바탕 바람몰이를 하고자 하는 시인, 거기다가 그릇된 시 창작 지 도서들이 끼친 나쁜 영향 때문은 아닐까? 이런 시대에 시가 무엇이냐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좀 슬프다. 그러나 어찌하랴. 우리 시단의 죽어가는 시부터 우선 살려놓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2019년 초 겨울

시간의 쪽배

나무가 쑥쑥 키를 올리는 것은 밝은 해를 닮고자 함이다. 그 향일성(向日性). 나무가 날로 푸르러지는 것은 하늘을 닮고자 함이다. 잎새마다 어리는 그 눈빛. 나무가 날로 푸르러지는 것은 하늘 마음, 하늘 생각 가슴에 품고 먼 날을 가까이서 살기 때문이다.

시로 쓴 유언

‘어떻게 사는 것인 진정한 삶인가, 그 해답을 들려줄 것이다.’ 이 시집은 죽음에 관련된 내용의 시들을 모아 묶어낸 사화집이다. 그러나 기실 그것은 삶의 진정성을 탐구한 내용의 시들이라고 말해야 더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삶은 진정한 죽음 의식 없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빛이 있음으로 그늘이 있듯 삶이 있음으로 죽음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인가, 답답하신 분들에게 이 시집의 일독을 권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시인들의 통찰과 에지가 맑은 감성, 유려한 언어로 잘 형상화된 이 시집의 수록 작품들이 그 해답을 들려줄 것이다.

왈패 이야기

겨울 나목을 보아라. 사람들은 황량하다 하지만 그것은 최선을 다한 뒤 고개 숙여 기다리는 자의 순결한 모습, 나무는 평생을 키워 올린 과실을 바치고 마침내 잎새조차 버린 채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그의 생애는 참으로 다난했지만, 그의 삶은 참으로 고달팠지만 나무는 더 이상 다다를 수 없는 존재의 높이에 이르러 다만 하늘의 긍휼을 기다리고 있을뿐이다. 최선을 다하고 고개 숙여 기다리는 자의 빈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제는 빛과 향으로 신이 채워야 할 그의 공간.

우상의 눈물

문학은 픽션이다. 그것은 사실로부터 자유로운 진실, 즉 '거짓의 진실'이라는 뜻이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상상력이 그 토대를 이룬다. 과학은 사실과 체험의 영역에 주거하고 문학은 진실과 상상력의 영역에 주거한다. 과학이 추구하는 진실과 문학이 추구하는 진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자가 이성적.논리적이라면 후자는 감성적.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서로 모순의 관계에 있으면서도 다만 모순으로 끝나지 않고 진실이 될 수 있는 그 오묘한 이치는 아마 이성적 사고로만 굳어 있는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진실'일 것이다. 서로 모순되면서도 어떻게 진실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상상력에 의해서 가능하다. 인간이란 한편으로 이성을, 다른 한편으론 감성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본질적으로 모순의 존재이며 상상력이란 모순되는 사고를 하나로 통합 혹은 조화시키는 힘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이처럼 바로 인간을 모순의 존재로 인정하는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하는 정신활동인 것이다.

중심의 아픔

좁게는 시, 넓게는 문학에 대해 쓴 단상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본다. 논리적인 글도, 체계적인 글도, 학술적인 글이나, 비평적인 글도 아닌 그저 주관적·직관적인 산문 담론들이다. 우리가 삶이나 세계를 이해하고자 할 때 꼭 이성적·합리적 사고에 의해서만 접근이 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문학도 경우에 따라서는 감성적 공감이 되레 의외의 시야를 열어줄 수 있는 것이다. 1부의 글들은 각종 매체의 문학 칼럼에 발표한 것들이며 5부의 글들은 필자가 한 문학단체의 책임을 맡았을 때 대내외적으로 밝힌 사회적 선언문들이다. 2, 3, 4부는 각각 필자가 저술한 학술 및 비평서, 시집, 수필집들의 서문들을 모아보았다. 이 역시 필자의 진솔한 문학관이나 시론 같은 것들이 나름대로 함축되어 있어 본서의 편집 의도와 전혀 무관치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한 권의 단행본으로 정리해놓고 보니 지금까지 필자가 추구해왔던 창작의 궁극적 경지는 간단히 ‘영원’과 ‘진실’이라는 두 키워드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영원이 아니면 진실이 될 수 없을 것이고 진실이 아니면 또 영원에 도달할 수 없을 터이니 기실 이 둘은 한 몸체의 양면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간절하게 사모해도 결국 그 ‘영원’이라는 경지에 도달할 수 없었던 이 한생이 다만 허무하고 애달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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