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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동주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20년, 대한민국 전라남도 해남 (물고기자리)

사망: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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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이동주 시선>

이동주

1920년 2월 28일 전남 해남군 현산면 읍호리에서 이조참판을 지냈던 이재범의 증손자로 이해영과 이현숙 밑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부가 해남 현산 초등학교를 세웠을 만큼 사대부의 위세가 당당한 가문이었으나 선친 대에 이르러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열세 살 되던 때 외가 쪽 충남 공주로 가서 보통학교를 마친 이동주는 상경해 고향 친구들과 함께 자취하며 한국외국어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로부터 문학적 소양을 얻고 아버지로부터는 방랑벽을 이어받아 평생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팔도를 떠도는 방랑객이자 타고난 낙천가였는데 스무 살 되던 해인 1940년에는 조지훈의 시 <승무>를 읽고 그와 그의 시에 심취해 혜화전문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만다.

혜화전문학교 재학 시절 ≪조광≫에 작품을 이따금 발표하다 해방 이듬해에 4인의 시집 ≪네 동무≫를 목포에서 간행했다. 이때 노산 이은상이 광주에서 창간한 호남신문 목포 주재 기자와 문화부 차장을 지냈다. 1948년 상경한 이동주는 신사조사(新思潮社)에서 근무하면서 조연현의 소개로 김영랑과 서정주를 처음 상면하게 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미당 서정주가 1950년 ≪문예(文藝)≫에 시 <황혼>, <새댁>, <혼야> 등의 작품을 추천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이동주의 이름 앞에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다.

1979년 61세에 위암 선고를 받고 마지막 7개월 동안에 무려 27편의 작품을 썼다. 죽음 앞에서도 구체적인 삶과 죽음을 의식하면서 이만큼 작품을 남긴 예가 드물 것이라고 한다. 시 창작의 조건이 지극히 불리했음에도 그러한 조건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작품을 남긴 사람, 치열한 창작 정신이 무엇에 근거했든 ‘시야말로 남길 값어치가 있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망 직전까지 작품을 썼다. 그가 남기고 간 저작물로는 시집 ≪혼야(婚夜)≫(1951)와 ≪강강술래≫(1959), 시선집 ≪산조(散調)≫(1979)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유고 시집 ≪산조여록(散調余錄)≫과 시선집 ≪이동주 시집≫(1987), 수필집 ≪그 두려운 영원에서≫ 등 100여 편의 수필과 ≪문인 실명 소설집≫ 등 50여 편의 소설을 남겼다. 특히 실명 소설(實名小說) 형식은 이동주가 처음 시도했기 때문에 큰 호응을 얻었다.

이동주는 1979년 1월 28일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서 눈을 감았으며 그의 만년유택은 경기도 양주 신세계공원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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