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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이름:안보윤

성별:여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81년, 대한민국 인천

직업: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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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밤은 내가 가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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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내가 가질게

누군가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날이 있었다. 직접 전할 수 없어 숨겨둔 말들이 소리 없이 들끓는 날이 있었다. 그런 날에는 종일 소설을 썼다. 그게 참 좋았다. 2023년 11월

밤의 행방

소설을 처음 구상할 때 나는 만들어진 죽음에 대해 쓰고자 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죽음이 범람하는 바람에 길을 헤매는 사신(死神)과 그를 안내해주기 위해 탄생한 반. 반은 죽음의 장소로 사신을 불러들이는 안테나이자 안내자 역할이었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자꾸 망설였다. 반의 미숙함과 상관없이 그가 마주하는 밤의 실체가 더없이 뚜렷하고 잔혹한 탓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밤이 탄생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거리에 밤의 씨앗을 흘리고, 누군가는 그림자처럼 발끝에 매달린 밤을 지르밟으며 걷고, 누군가는 폐로 스며든 밤의 기척에 뒤척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무섭고 두렵다. 그리고, 슬프다.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내게 있어 소설이란 그랬다. 타인의 책상에서 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부끄럽게도 나는 타인의 삶을 짐작해왔을 뿐이다. 온전히 응시하지 못한 채, 그들의 삶 속으로 단 한 발짝도 걸어들어가지 못한 채. 때문에 지금의 나는, 더없이 부끄럽고 두렵다. 나는 아직 누구의 삶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더 깊어지고 싶다. 그리하여 더, 오래 쓰고 싶다.

사소한 문제들

백지 위에 놓인 것은 발가벗은 글자들이다. 끝이 검은 칼로 그것들을 해체한다. 갈비뼈를 닮은 형태, 아주 약간의 숨만 지닐 수 있는 파편으로. 나는 기꺼이 백정이 된다. 파편이 침묵하는 것은 나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땀에 젖은 나를 조롱하기 위해서다. 파편을 줍는다. 내려놓는다. 비틀거나 꺾는다. 발로 으깬다. 가마에 넣고 굽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파편은 오만해지고 나는 수줍어진다. 무수히 많은 두식과 아영 들이 가마 속에서 터져나갔다. 가느다란 선으로 나뉜 검은 이마와 핑크색 살덩이, ㄱ자로 꺾인 발가락뼈, 으깨진 송곳니 따위가 아직 이 안에 있다. 완성된 것보다 부스러진 것들에 더 마음이 가는 건 내가 아직 행복하지 못해서다. 깊고 기름진 우울에 잠식당한 그림자들이 이곳에 묶여 있다. 그들이 부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기를. 나는 줄곧 빚진 기분으로 살아왔고, 실제로도 빚을 졌다. 아빠가 고혈압인 것과 엄마 심장이 나쁜 것은 내 탓이다. 스승 앞머리가 유난히 흰 것도, 언니들 눈 밑이 움푹 꺼진 것도 내 탓이다. 무관심과 방치에 질린 이들이 내게서 등을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뻔뻔하게 계속 쓰는 수밖에. 한 글자씩 부지런히 갚아나갈 작정이다. 끈질긴 것만이 내 유일한 장점이므로. 바람이 차다. 누가 온기를 한 줌 쥐여주었으면 좋겠다. 당신과 나의 쓸쓸한 손에. 2011년 가을

소년7의 고백

일그러지다. 세계를 떠올리면 늘 저 단어가 떠올랐다. 사람과 사물과 감정과 상식에 ‘일그러진’을 붙이면 이 세계가 되었다. 누구도 바라지 않는 순환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대개 일그러진 그림자들이 서로의 목을 밟고 서 있었다. (……) 세계를 떠올리며 숨을 몰아쉬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까. 검은 분진이 날리는 글자들을 빼고도 세계에 대해 기록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가죽 주머니를 꽉 움켜쥐고 기다리면 어느 날은 홀가분하다, 라고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도 할까.

알마의 숲

기우뚱한 것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서ㅤㅌㅜㄻ에 대해 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밧줄과 주먹밥을 움켜쥐고 산에 오르는 누군가를 다만 응시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무엇이었든 진심이었다. 올빼미가 말하길 후룻 훗. 이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2015년 봄 안보윤

알마의 숲

기우뚱한 것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서툶에 대해 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밧줄과 주먹밥을 움켜쥐고 산에 오르는 누군가를 다만 응시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무엇이었든 진심이었다. 올빼미가 말하길 후룻 훗. 이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2015년 봄

어떤 진심

견디기 어렵다, 라는 감정을 나는 소설을 통해 배웠다. 스무 살 무렵만 해도 나는 세계와 무관하게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적절히 갈무리된 마음과 표정으로 매일을 살았다. 손 편지를 쓰지 않으면 답장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나는 타인을 곁눈질하고 닥쳐온 불행은 적당한 크기로 잘라 삼켰다. 이상하리만치 쉬운 날들이었다. 소설을 쓰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감탄을 흉내 내고 실수를 떠넘기면서 의심도 연민도 없이. 그런 삶이 나쁜가 하면. 모르겠다. 다만 쓸쓸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는 진심을 불행과 함께 조금씩 찢어 삼켜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자주 비루해진다. 간혹 평온했다가 끝내 외로워진다. 선물이 될 수 없는 누군가의 삶이 나를 비루하게 만들고 그럼에도 눈 감지 않는 누군가의 의지가 나를 평온하게 만든다. 거울 속 일그러진 얼굴은 화가 난 게 아니라 고독해서다. 사람에게 사람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 역시, 나는 소설을 통해 배웠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고이지 않는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기어코 써버린 문장이 당혹스러워 온몸으로 문질러 지우던 날들이 있었다. 수상소식은 내게, 그런 시간조차 헛된 것이 아니라고 일러주는 것만 같았다. (……) 부서진 진심에 대해 쓰고 나서야 진심을 믿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아는 모든 것이다. - 수상 소감

여진

축축한 발 때문에 한기가 올라올 때면 뭐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이전과 이후의 이야기를 쓰고 나면 그럭저럭 마른 발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편평한 땅 위를 발자국 없이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소설을 끝낸 지금도 나는 여전히 웅덩이 속에, 젖은 발로 서 있다. (……) 애틋해하는 마음.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자리에 고이는 노란 불빛. 좋아지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기어코 이겨내는 마음. 그런 걸 나는 소설을 통해 배운다. 아주 조금씩만 성장하는 아이들과 놋쇠처럼 무거운 슬픔. 오래 들여다볼수록 단단해지는 그림자. 그런 걸 나는 소설을 통해 감각한다. 이상한 일이다. 소설 속에서의 나는 현실에서의 나보다 반 뼘쯤 더 크다. 조금 더 예민하고 소란스럽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직해지고야 만다. 2022년 6월 안보윤

오즈의 닥터

어릴 적 내가 싫어하던 동화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였다. 나는 동화 속에 나오는 이발사를 파렴치한이라고 생각했다. 기억하는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식의 굳은 머리를 가진 나로서는 돈까지 받아놓고 뻔뻔스럽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발사가 고까울 리 없었다. 나는 분개했지만 이발사는 처벌조차 받지 않았다. 거대한 크기의 왕관이 작아지고, 임금님이 시원스럽게 귀를 내놓고 지내게 되었다는 낯간지러운 결말만이 이야기 끝에 남아 있었다. 동화라면 무엇보다 권선징악이 아닌가. 진부하지만 그런 것이다. 팥쥐는 육젓이 되고 마녀는 불에 달군 구두를 신고 숨이 멎을 때까지 춤추는 게 잔혹하지만 당연한 동화의 세계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발사의 미래는 저리도 순탄하단 말인가. 나는 이발사에 대해 자주 떠올렸다. 그의 무책임함과 자기애착, 그럼에도 보장된 그의 안온한 일상의 부당함에 분노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말을 할 필요가 뭐 있는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주 단순한 일이다. 머릿속을 비우고 입술 끝만 내리면 된다. 목숨까지 걸면서 소리칠 까닭이 대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연민이 피어올랐다. 문득문득, 이발사가 안쓰러워지기까지 했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야기하고 싶어 환장한 그의 모습이, 이야기를 못해 몸져누운 그의 모습이 나와 너무도 닮아 있다는 사실을. 그랬다. 나는 말하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단순히 뭔가를 쓰는 것에 만족할 수 있다면 백날이고 천날이고 일기를 쓰면 될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내 속에 지닌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어 안달이 나고 병이 났다. 대나무 숲에서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기분으로 나는 노트북 자판을 두드려댔다. 나의 골방은 얇은 대나무가 촘촘히 박힌 대숲이었다. 이걸 좀 읽어줘. 나는 밤마다 대나무들에게 매달려 애원했다.

오즈의 닥터

어릴 적 내가 싫어하던 동화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였다. 나는 동화 속에 나오는 이발사를 파렴치한이라고 생각했다. 기억하는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식의 굳은 머리를 가진 나로서는 돈까지 받아놓고 뻔뻔스럽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발사가 고까울 리 없었다. 나는 분개했지만 이발사는 처벌조차 받지 않았다. 거대한 크기의 왕관이 작아지고, 임금님이 시원스럽게 귀를 내놓고 지내게 되었다는 낯간지러운 결말만이 이야기 끝에 남아 있었다. 동화라면 무엇보다 권선징악이 아닌가. 진부하지만 그런 것이다. 팥쥐는 육젓이 되고 마녀는 불에 달군 구두를 신고 숨이 멎을 때까지 춤추는 게 잔혹하지만 당연한 동화의 세계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발사의 미래는 저리도 순탄하단 말인가. 나는 이발사에 대해 자주 떠올렸다. 그의 무책임함과 자기애착, 그럼에도 보장된 그의 안온한 일상의 부당함에 분노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말을 할 필요가 뭐 있는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주 단순한 일이다. 머릿속을 비우고 입술 끝만 내리면 된다. 목숨까지 걸면서 소리칠 까닭이 대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연민이 피어올랐다. 문득문득, 이발사가 안쓰러워지기까지 했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야기하고 싶어 환장한 그의 모습이, 이야기를 못해 몸져누운 그의 모습이 나와 너무도 닮아 있다는 사실을. 그랬다. 나는 말하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단순히 뭔가를 쓰는 것에 만족할 수 있다면 백날이고 천날이고 일기를 쓰면 될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내 속에 지닌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어 안달이 나고 병이 났다. 대나무 숲에서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기분으로 나는 노트북 자판을 두드려댔다. 나의 골방은 얇은 대나무가 촘촘히 박힌 대숲이었다. 이걸 좀 읽어줘. 나는 밤마다 대나무들에게 매달려 애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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