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헤더배너
상품평점 help

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번역

이름:이윤기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47년, 대한민국 경상북도 군위 (황소자리)

사망:2010년

직업:작가 번역가

기타:성결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고, 순천향대학교에서 문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데뷔작
1977년 하얀 헬리곱터

최근작
2022년 4월 <[큰글자도서] 진홍글씨>

이 저자의 마니아
마니아 이미지
로쟈
1번째
마니아
마니아 이미지
순오기
2번째
마니아
마니아 이미지
oren
3번째
마니아

엮인 저자
12

그리운 흔적

아직도 심중에 말 한마디가 남아 있다. 나는 이 말을 내 연하의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이 소설의 화자(話者)같이 살지 마세요." 문예지 '문학사상'에 이 소설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내가 쓰려고 마련해 둔 말이 있었는데, 한 시인이 노래로 불러 버리는 바람에 나의 말은 그만 헌 말이 되고 말았다. 한 생각의 압축파일 같은 이 한 구절 운문 앞에서 나의 산문은 얼마나 초라한가. 시는 위대하다. 우리 심정을 이렇듯이 단숨에 깨물고 들어올 수 있을 때 시인은 시와 함께 위대해진다. ..... 물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 한 죄 (이문재의 시 '노독'의 일절)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라니...... <그리운 흔적>은, 함부로 길을 나서 보지도, 길 너머를 그리워 하는 죄를 지어보지도 못한, 한 범용한 인간의 이야기다. 나에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다만, 어떻게 살면 안 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이제 겨우 마련되고 있을 뿐이다. 더 아름답고자 하는 자에게, 범하지 못할 법칙은 이 세상에 '없다'.

나무가 기도하는 집

내 아들딸에게 아비 온 데로 돌아가면 평장(平葬)하고 그 위에다 다만 나무 한 그루만 심으라고 할 생각. 옳거니,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래서 이렇게 노래했을 터이거니. 우리는 하나의 심연에서 와서 또하나의 심연으로 간다. 이 심연과 심연 사이를 우리는 인생이라고 부른다.

내 시대의 초상

나는 '이상한 세대'에 속한다. ...내 땅에 살면서 남의 나라 말로 사유했다.그러면서 문화의 주변부를 오래 떠돌았다. 지난 세기의 마지막 9년 동안 외국에서 살았다. 새 세기의 3분의 1도 나라 밖을 떠돌면서 보냈다. 호롱불 밑에서 <천자문>을 읽던 그 아이 앞에는 지금 전기를 먹는 기계가 잔뜩 놓여 있다. 컴퓨터와 필름 스캐너와 프린터와 복사기와 평판 스캐너와 디지털 카메라가 즐비하다. 21세기를 좇아가려니 숨이 가쁘다. 내 몸은 19세기와 20세기와 21세기가 함께 흐르는 강 같다.

노래의 날개

유행가의 노랫말들이 요즘 들어 마음에 절실하게 묻어든다. 읽히는 시의 생명보다는 불리는 노래의 생명이 더 긴 것 같다. 시는, 물물의 핵심을 향해 똑바로 다가가 적확하게 무찌르기를 지향하는 것 같다. 그래서 시는 때로 시인의 진실 쪽으로 너무 가파르게 기울게 되는 것 같다. 노래는 물물의 가슴에 비수 들이대는 것이 두려운지 핵심을 피해 스치듯이 지나가는 것만을 지향하는 것 같다. 스치듯이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 물물의 궁극적 실재를 투욱 건드리는 것 같다. 선사의 말씀 한 마디처럼 그렇게 투욱 건드리는 것 같다. 그런 노래 한 마디 부르고 싶었는데. 아,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이다.

두물머리

세번째 소설집을 꾸미면서 내가 어디에서 삶의 기운을 퍼오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20세기를 다 보내고 나서야, 그것도 어렴풋이. 그래. 나를 감도는 기운은 내가 우겨 넣는 음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박자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늘이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는, 솜씨좋은 사람의 노래,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박해받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분노, 죽어버린 듯한, 그러나 죽어본 적이 없는 산과의 대화, 나의 과거 같기도 하고 나의 미래 같기도 한 나무,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과의 교감, <예감에 가득 찬 숲 그늘> ... 이런 것들이 나의 기운이 된다. 그래. 소설가는 <거짓된 진실>, 혹은 <진실한 거짓>을 써야 한다.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큰 모순을 지어내어야 한다. 옥시모론(矛盾語法). 오래전에 그것을 깨달은, 정교한 예술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도 허물을 벗어야겠다. 네번째 소설집을 낸 뒤에, 이 소설집으로 돌아와서 확인해 보겠다. 과연 이 세번째 소설집이 내가 집으로 돌아와서 확인해 보겠다. 과연 이 세번째 소설집이 내가 벗은 허물인지. 허물을 제대로 벗어놓고 떠났던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그 몸으로 탈피를 꿈꾸면서 떠돌았는지 확인해 보겠다. 그러니까, 나는 방자하게도, 내가 벗은 허물이라면서 이 세번째 소설집을 세상에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절망적인 희망>이 있다.

무지개와 프리즘

나는 글을 쓸 때마다 청년들을 많이 의식한다. 특히,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으로 힘들어하는 청년들을 많이 의식한다. 나는 그들에게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말을 끊임없이 들려주고 싶어한다. 이 책이 한 10년 더 살아 있게 될지, 슬며시 무대에서 사라지게 될지 두고 볼 수밖에 없다.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대로 고마운 일이겠고, 사라지면 잊혀질 터이니 그 또한 좋은 일이겠다. 하지만 나는 청년들에게 이 책이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절대로 접고 싶지 않다.

뮈토스 1

나는 <도망친다>라고 해도 좋을 것을 <도타한다>고 쓴 것을 반성한다. <자국을 지운다>고 하면 될 것을 <유탕한다>고 쓴 것을, <지나치다>고 하면 될 것을 <참람하다>고 한 것을 반성한다. 나는 이 책을 교열하면서 수백 개의 한자말을 몰아내었다. 부러 꼬고 비틀어 어렵게 만든 표현도 나는 쉬운 표현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말살이 글살이에서도 나는 포즈를 버리고자 한다. 나는 이제까지 부리던 말을 버리고 새로운 말을 부리고자 한다.('개정판에 부치는 글' 가운데)

뮈토스 1

자, 여기에 사과 한 알이 있다. 로고스는 <불화의 사과>에서 <윌리엄 텔의 사과>에 이르기까지 사과의 역사를 논하고 사과의 본질 따지고 사과가 의미하는 바를 논증한다. 뮈토스는, 뮈토스 이외의 어떤 목적도 갖지 않는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 진실한 것이 고여 있되, 이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 진실한 것은 검증된 것이 아니고 믿어진 것이다. 여기에 사과 한 알이 있다. 뮈토스는 그 사과를 달게 먹는다.('서문' 가운데)

뮈토스 2

자, 여기에 사과 한 알이 있다. 로고스는 <불화의 사과>에서 <윌리엄 텔의 사과>에 이르기까지 사과의 역사를 논하고 사과의 본질 따지고 사과가 의미하는 바를 논증한다. 뮈토스는, 뮈토스 이외의 어떤 목적도 갖지 않는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 진실한 것이 고여 있되, 이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 진실한 것은 검증된 것이 아니고 믿어진 것이다. 여기에 사과 한 알이 있다. 뮈토스는 그 사과를 달게 먹는다.('서문' 가운데)

뮈토스 2

나는 <도망친다>라고 해도 좋을 것을 <도타한다>고 쓴 것을 반성한다. <자국을 지운다>고 하면 될 것을 <유탕한다>고 쓴 것을, <지나치다>고 하면 될 것을 <참람하다>고 한 것을 반성한다. 나는 이 책을 교열하면서 수백 개의 한자말을 몰아내었다. 부러 꼬고 비틀어 어렵게 만든 표현도 나는 쉬운 표현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말살이 글살이에서도 나는 포즈를 버리고자 한다. 나는 이제까지 부리던 말을 버리고 새로운 말을 부리고자 한다.('개정판에 부치는 글' 가운데)

뮈토스 3

나는 <도망친다>라고 해도 좋을 것을 <도타한다>고 쓴 것을 반성한다. <자국을 지운다>고 하면 될 것을 <유탕한다>고 쓴 것을, <지나치다>고 하면 될 것을 <참람하다>고 한 것을 반성한다. 나는 이 책을 교열하면서 수백 개의 한자말을 몰아내었다. 부러 꼬고 비틀어 어렵게 만든 표현도 나는 쉬운 표현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말살이 글살이에서도 나는 포즈를 버리고자 한다. 나는 이제까지 부리던 말을 버리고 새로운 말을 부리고자 한다.('개정판에 부치는 글' 가운데)

뮈토스 3

자, 여기에 사과 한 알이 있다. 로고스는 <불화의 사과>에서 <윌리엄 텔의 사과>에 이르기까지 사과의 역사를 논하고 사과의 본질 따지고 사과가 의미하는 바를 논증한다. 뮈토스는, 뮈토스 이외의 어떤 목적도 갖지 않는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 진실한 것이 고여 있되, 이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 진실한 것은 검증된 것이 아니고 믿어진 것이다. 여기에 사과 한 알이 있다. 뮈토스는 그 사과를 달게 먹는다.('서문' 가운데)

반야심경

인도 문화권에서 쓰이는 인사말 ‘나마스떼’는 ‘당신에게 깃들어 있는 신께 문안 드립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가만히 음미하다 보면 등짝이 서늘해진다. 인도인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 안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고대 힌두교의 한 발전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 역시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섬긴다. 인도 출신 명상가 오쇼 라즈니쉬의 책《반야심경》의 첫 글월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 안에 깃들어 있는 부처께 문안 드립니다.” 라즈니쉬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 안에는 부처가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우리 안에는 부처가 분명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부를 지음으로써 깨닫는다는 것은 그 부처의 잠을 깨우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신화

나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가 이제는 더이상 남의 신화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다. 우리 문화가 서양 문화를 향해 가파른 기울기를 보인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로마 신화가 우리 독자의 교양에 녹아들기를, 그리스와 로마 신화의 어휘가 우리 문학의 어휘에 합류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신화집의 새 번역본을 꾸미면서 간절히 희망한다.

시간의 눈금

시간 혹은 세월을 느끼는 일에 좀 둔해지고 싶었다. 나이 같은 것은 숫자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산문집 묶어내려고 그 동안 여기저기에다 쓴 글들을 모아놓고 보니 나는 아무래도 세월 느끼는 일에 둔해지는데, 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못한 것이라고 믿는 데 실패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20년 전, 30년 전, 40년 전, 이런 말들 자주 쓴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그래서 제목도 '시간의 눈금'이 되어버린 것인가.

신들의 전성시대

나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가 이제는 더이상 남의 신화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다. 우리 문화가 서양 문화를 향해 가파른 기울기를 보인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로마 신화가 우리 독자의 교양에 녹아들기를, 그리스와 로마 신화의 어휘가 우리 문학의 어휘에 합류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신화집의 새 번역본을 꾸미면서 간절히 희망한다.

신화의 힘

“《신화의 힘》에서 캠벨은, 궁극적인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모습을 읽어내고는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휩쓸리면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캠벨의 자기 구원이 곧 우리의 자기 구원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옵니다만, 캠벨이 그렇게 이르렀으니 우리도 그의 눈길과 용기와 깨달음을 길잡이 삼아 거기에 이르러야 하지 않을런지요? 이 대담을 녹화하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가 한 말은, 그로부터 불과 2년 뒤인 1987년 10월에 그가 맞았던 죽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의 확신과 확인을 통해 이른 평화는 곧 신화가 우리에게 안기는 희망일 것입니다.”

양들의 침묵

우리나라의 경우 영화의 모본이 되는 소설, 특히 베스트셀러가 되는 외국 소설이 과소 평가되는 일이 허다하다. 하지만 '베스트셀러' 딱지와 문학적 품질 보증서가 상호 배타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토머스 해리스는 문학적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고도 자신의 문학을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재능, 말하지만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재능을 갖춘 드문 작가다. - 이윤기 (옮긴이)

영웅의 전성시대

나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가 이제는 더이상 남의 신화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다. 우리 문화가 서양 문화를 향해 가파른 기울기를 보인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로마 신화가 우리 독자의 교양에 녹아들기를, 그리스와 로마 신화의 어휘가 우리 문학의 어휘에 합류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신화집의 새 번역본을 꾸미면서 간절히 희망한다.

우리가 어제 죽인 괴물

신문과 잡지에 쓴 글들이다. 이런 글들을 흔히 <잡문>이라고 이름지어 놓고, 나에게 <잡문 쓰는 걸 자제하라>고 충고하는 친구들도 있다. 나는 그들의 우정어린 충고를 오래 무시했다. 그대들에게는 잡문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아니다. 나는 대체로 이런 주장을 폈던 것 같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글을 써놓고 그것을 잡문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산문이다. 재주가 없어서 그럴 것이다. 나는 글을 참 어렵게 쓴다.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국내문학상수상자
국내어린이문학상수상자
해외문학상수상자
해외어린이문학상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