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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과학/공학/기술
국내저자 > 인문/사회과학

이름:이진경

본명:박태호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3년, 서울

기타: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 동대학원 박사학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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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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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필자는 이 책을 통해 주거공간의 역사에 대한 진화론적 관념, 그것을 근거로 사적 공간을 절대화하는 관념 등에 대해 일정 정도 문제제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주거공간, 새로운 종류의 삶의 방식을 꿈꾸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바램이다.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이 책에서 나는 주거공간의 배치와 가족 형태의 변화를 역사적으로 다룸으로써 근대인들의 삶의 방식을 직조하는 가족적 삶의 방식이, 혹은 가족주의적 욕망의 배치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떠한 '물리적' 조건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 안에서 개개인을 근대적 주체로 구성하는 일상적 메커니즘을 추적하고자 했다.

김시종, 어긋남의 존재론

《광주시편》의 「바래지는 시간 속」과 《니이가타》가 내 안에서 공명하며 시를 따라갈 단서가 불쑥 솟아올랐다. ‘어긋남’, ‘존재론적 어긋남’이란 말이 시집을 읽는 내 시야를 맴돌았다. 그리고 그 말을 따라 김시종 선생의 시가, 시적 사유가 내게 밀려들어왔다. 그가 빠져 들어간 심연이, “뒤돌아보면 정말 미치지 않고 잘도 살아왔구나 싶다”는 그의 삶이, 그 삶 속에서 그를 사로잡은 깊은 어둠이 시커멓게 입을 벌리며 다가왔다. 그 어둠은 ‘존재’의 어둠이었다. 규정성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예측불가능한 힘으로 존재자의 삶을 바꾸어 놓으며 다른 삶으로 가는 출구를 여는 어둠, 어떤 세계 안에 살면서도 항상 그 바깥에 살게 하는 어둠. 존재론의 장소는 빛이 드는 숲속이나 세계가 아니라 그 캄캄한 어둠 속에 있다는 생각이 마치 깨달음처럼 왔다. 그 어둠에 단숨에 끌려들어간 것은 이전에 내가 보았던 어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삶을 걸었던 한 세계의 몰락 속에서 빠져 들어갔던 어둠. 생각해보면, 허무의 심연이었던 그 어둠으로 인해, 그 속에서 얻은 물음들 덕에 그동안 다른 삶을 찾아 헤매며 살아왔던 것인데, 존재론을 하겠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만 따라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시도가 헛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나 《코뮨주의: 공동성과 평등성의 존재론》을 통해 시도했던 ‘존재자’의 사유는 ‘존재’를 향해 나아가야 했다. ‘존재자’의 존재론은 ‘존재’의 존재론을 향해 나아가야 했다. 그것은 존재를 사유하려는 것이란 점에서 연속적이지만, 어둠 속을 더듬고 다니며 사유해야 한다는 점에서 세계성을 따라가던 사유와는 상반되는 것이고, 따라서 적지 않은 불연속성을 갖는 것이라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김시종의 시에 대한 책인 것 못지않게 내가 밀고 가고 있는 존재론적 사유의 새로운 변곡점을 담고 있는 책이다.

노마디즘 1

이 책은 <천의 고원>에 대한 책이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그 책에 대해 강의했던 것을 기초로 하여 씌어진 책이다. 그렇지만 단지 그 책에 대한 책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 책을 통해 내가 말했던 기록이고, 그 책과 더불어 내가 사유했던 기록이며, 그 책-기계를 이용해서 내가 알게 된 것, 만들어낸 것들의 기록이다. 또한 그 책을 통해서 내가 그들의 사유와 섞이면 끄집어낸 것들의 모음이다. 요컨대 그 책을 따라가면서 그들과 내가 만나고 헤어졌던 흔적들의 집합이다. 따라서 이 책은 <천의 고원>에 대한 책이지만, 그들과 나의 우정의 기록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 이진경(지은이)

노마디즘 2

이 책은 <천의 고원>에 대한 책이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그 책에 대해 강의했던 것을 기초로 하여 씌어진 책이다. 그렇지만 단지 그 책에 대한 책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 책을 통해 내가 말했던 기록이고, 그 책과 더불어 내가 사유했던 기록이며, 그 책-기계를 이용해서 내가 알게 된 것, 만들어낸 것들의 기록이다. 또한 그 책을 통해서 내가 그들의 사유와 섞이면 끄집어낸 것들의 모음이다. 요컨대 그 책을 따라가면서 그들과 내가 만나고 헤어졌던 흔적들의 집합이다. 따라서 이 책은 <천의 고원>에 대한 책이지만, 그들과 나의 우정의 기록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 이진경(지은이)

모더니티의 지층들

대학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혹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회 전반에 대해서, 동시에 그것을 보는 다양한 이론적 시야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라면 거대이론을 꿈꾸는 시대착오라도, 포괄적 분석을 위해 치밀함을 잃는 허술함이라도 감히 감수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론적으로 고고한 이론가보다는 허술함을 감수하며 대중에게 다가가는 이론가가, 이론이 대중과 결합함으로써 세상을 바꾸게 만들 것이라는 꿈에 훨씬 더 가까우리라는 믿음에서다. - 이진경(편저자)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우리는 현대 문화를 특징짓는 현상 그 자체에 매몰되기보다는 그것의 지반을 형성하는 좀더 넓은 문화적 구성체들에 눈을 돌리고 싶었다. 근대라는 시대와 강력한 친화성을 갖는 시간이나 공간적 형식, 그리고 기억과 역사의 문제, 시선이나 얼굴의 문제등에 주목하고자 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미-래의 맑스주의

나는 이 책의 불온함이 이 책을 읽는 분들의 또 다른 불온함을 촉발하고 증식시키길 바란다. 그것이 또 다른 종류의 불온한 사유를 생산하길 바란다. 그 불온한 사유가 다시 내게 다가와 또 다른 사유의 길이 있음을, 또 다른 삶의 방향이 있음을 알려주고 촉발하길 기대한다. 그리하여 불온한 사유가 이 불모의 땅에 새로운 삶/생명으로 퍼져나가, 우리가 발딛고 선 대지 전체를 다시금 불온하게 뒤흔들게 되기를 기대한다.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이 책에서 나는 ‘존재론’이라고 불리는 ‘거창한’ 작업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것을 흔히 하듯이 인간이라는 존재자, 존재의 의미를 아는 유일한 존재자, 그렇기에 탁월하고 지고한 존재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불온한 것들’을 통해서 하고자 한다.. 불온한 것들, 어떤 누군가를 불편하고 불안하게 하는 자들이다. ‘인간도 아닌 것’, ‘생명이 없는 것’, ‘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 ‘하등하다’며 천시되고 비난받는 것들이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보편성에 대한 확신, 모든 이들과 싸우려는 듯이 신랄하게 날이 선 문체 모두에서 나 또한 불편한 위화감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대로 자신의 조건이 있었고, 자신의 시간 속에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가 착취와 억압, 폭력이 횡행하는 세계에서 새로운 삶의 모델이 되어주었고, ‘정통성’이 올바른 맑스주의의 척도가 되었던 시간, 죽은 자들의 유령이 산 자들과 함께 싸우고 산 자들에게 목숨을 걸 것을 유혹하던 시간, 원칙도 전략도 근본적인 방향도 없이 그저 달리던 운동에 ‘올바른’ 원칙을 수립하고, ‘올바른’ 방향을 부여하고 올바른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요구에 모든 걸 던져 넣어야 했던 시간, 그 모든 시간의 흔적이 지금 다시 읽는 그 책 속에 있었고, 그 책에서 느끼는 위화감 속에 있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이전에 쓴 모든 책에서 그와 유사한 어떤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라는 방식으로 그 위화감을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시대착오처럼 다가오는 그 위화감 속에서 그저 지나간 시간만을 보기보다는 ‘때 아닌 시간’을 보아주길 부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럴 요소가 있다면, 그 ‘때 아닌 시간’ 속에서 읽어주길, 그럼으로써 이 책을 다른 책으로 만들어주길 부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에서)

수학의 몽상

근대 과학에서 수학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근대 문명 전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만큼 수학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우리의 삶은 항상, 이미 둘러싸고 있다. 계산하는 생활, 모든 것을 계산하려는 문명. 그것이 근대 문명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까이 있기에 우리는 이미 무의식적으로도 충분히 수학적으로 사고하고 수학적으로 판단한다. 이런 의미에서 수학은 하나의 사고방식이고 삶의 방식이다. 수학은 이미 수식이나 이상한 기호를 사용하는 계산기술만도, 혹은 난해한 공식과 정리의 집합만도 아닌 것이다. 이는 근대 초기의 중요한 수학자가 모두 과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수학을 통해서 자신의 새로운 사유를 발전시켰다는 것 역시 수많은 사례로 입증된다. 이런 의미에서 수학은 이미 하나의 철학이다.

잃어버린 계절

이 시집에 붙인 ‘사시(四時)시집’이라는 부제는 사계절을 따라 자연과 인간의 서정을 노래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읽게 되는 것은 사계절로 상징되는 자연과 인간의 삶을, ‘잃어버린 계절’이라는 제목처럼 시간을 거스르며 ‘잃어버리고’ 이미 잃어버린, 그러나 잊을 수는 없었던 멈춘 시간을 통해 계절의 시간을, 자연 또는 인간을 다른 어떤 것으로 대면하려는 시적 긴장이다. 자연스러운 서정의 내부로 들어가 그 서정을 멈추고 교란하려는 반서정적 서정시이다. (…) 『잃어버린 계절』은 평상시에는 거기에 있는지 누구도 모를 만큼 작은 존재에 시선을 던지면서, 동시에 생활의 장을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수직의 시선을 통해 아득하지만 인접한 거리를 바로 ‘내’가 서 있는 그곳에서 보여준다.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 아득한 것, 혹은 아득히 멀리 있는 가까운 것의 역설적 감각은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 또한 보지 못해도 있음이 분명한 것들을 지각하는 감각을 준다. 그것은 수직적 시간의 경험과 더불어 우리의 삶을 밑바닥에서 흔드는 것이다. 2019년 여름 이진경, 카게모또 쓰요시

철학과 굴뚝청소부

이 책은 근대 철학이 자신과 중세 철학 사이에 만드는 '경계'를 통해, 그리고 탈근대적 문제 설정이 근대 철학을 넘어서려 하면서 만들어낸 경계를 통해 철학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한다.더불어 각각의 시대 내부에서 다양한 흐름과 철학자들의 사고가 상충하면서 만들어낸 경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주제는 분명 '철학의 경계'다. 하지만 근대 철학의 접경 지대에서 그어지는 그 경계는 근대 철학이 피할 수 없었던 딜레마의 소산이다. 그것은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굴뚝 청소부 얘기로 요약할 수 있다. 문제 : 두 사람의 굴뚝 청소부가 청소를 마치고 내려왔다. 한 사람은 얼굴이 더러웠고, 한 사람은 얼굴이 깨끗했다. 이 중 과연 누가 세수를 하게 될까? 답 :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서 자기도 더러우리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으로 양분되면 인식된 게 사실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확인할 길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란 불가능하단 말인가? 진리에 도달하려는 근대 철학자는 이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여러 가지 탈출구를 찾아낸다. 근대 철학의 다양한 흐름과 사상이 이런 식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즉 굴뚝 청소부의 딜레마를 통해 근대 철학의 내부, 외부에 있는 경계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란 것이다. '철학과 굴뚝 청소부'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붙여서 제목으로 단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철학의 모험

이 책을 쓴 목적은 하나다. "자기 머리로 철학하는 법을 배우자!" 이게 바로 이 책의 핵심 슬로건이다. 이 책을 읽고 스스로 사고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스스로 사고하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 스스로 사고하기 위해선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정리해둘 수 있다면 이 책의 소박한 바람은 이루어진 셈이다.

코뮨주의

“일단 코뮨주의를 존재론적 입장으로까지 끌고 가서 사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개체는 중생이다’라고 하는, 생명과학을 공부하면서 얻은 결론인데, 이것이 그 출발점이다. 중생으로서의 집합적인 요소들이 하나의 개체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공동성이다. 이 공동성은 어떤 특이점들을 통해서 구성된다. 여기까지가 철학적인 차원에서 코뮨주의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역사이론, 사회학적 관점에서의 코뮨주의이다. 사회구성체라는 것과 코뮨주의를 어떻게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생산이론의 경우, 생산의 개념을 경제학적인 것을 넘어서 확대하고자 했을 때의 이야기다. 내 식으로 하자면 기계주의적 생태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텐데, 기존 정치경제학과 생태학에 대한 비판점들을 가지고 이론적인 일관성을 갖는 지점들을 찾아냈다고 본다. 그리고 생명의 정치학 부분은 코뮨주의가 생명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코뮨주의는 휴머니즘을 넘어서 고민되어야 한다. 인간이 아닌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권리. 인권을 넘어서는 새로운, 좀더 일반적인 권리를 사고해야 한다. 코뮨의 윤리는 코뮨주의와 관련해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구체적인 지점들에 대한 건데, 예를 들면 휴머니즘을 넘어섰을 때 인간과 생명 기계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지, 선물이란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해 윤리의 관점에서 고민한 것이다.”(인터뷰 중에서)

필로시네마 혹은 영화의 친구들

사실 '필로시네마'라는 말은 알다시피 철학을 뜻하는 그리스어 필로소피아의 조어법을 따라 만든 말이다.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sophia) 대신에 영화를 뜻하는 시네마(cinema)를 '좋아하다', '사랑하다'를 뜻하는 필로스(philos)와 접붙여 영화와 철학을 '좋아하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우정의 형식으로 시도했던 책이다. 그것을 통해서 영화 속에서 철학을 읽고 철학을 통해서 영화를 보는 일종의 '종합'을 시도한 셈이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영화에서 철학의 친구들을 발견하고자 했으며, 또한 그 이상으로 철학에서 영화의 친구들을 발견하고자 했다. 들뢰즈는 "철학이란 친구와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이는 철학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철학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에도 철학은 친구와 함께 있었고, 친구와 더불어 자신을 펼쳤음을 우리는 안다. 어느 시대에는 기하학이, 다른 시대에는 물리학이, 혹은 생물학이 철학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또 어떤 시대에는 문학이, 혹은 음악이, 혹은 역사와 정치가, 아니면 경제학이 친구가 되어 주었으며, 또 다른 시대에는 사람들의 삶 자체가, 혹은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이 철학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삶의 사유를 극한으로 밀고 가는 것들을 친구로 삼음으로써 철학은 삶과 사유를 사유했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새로운 극한으로 만들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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