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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장석주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55년, 대한민국 충청남도 논산 (염소자리)

직업: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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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꿈속에서 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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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우는 사람

이 시집은 ‘파주 시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파주의 날씨와 계절들, 고양이들과 저녁의 쓸쓸함이 만든 멜랑콜리가 시를 일으켰을 테다. 부엌과 죽은 자들과 어머니에 대해 다 쓰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악력이 줄고 근육이 소실되자 체념에도 제법 익숙해진다. 한때 시를 쓰는 게 존재 증명이었지만 이 찰나 시는 무, 길쭉한 공허, 한낮의 바다, 평온 몇 조각일 뿐이다. 남은 날을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무릎을 꺾은 채 고요한 자세로 신발끈을 맨다. 2024년 3월 파주에서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

세상의 음악 중에서 고전음악만을 고집해 듣던 소년은 책을 좋아했다. 책읽기가 “눈이 하는 정신 나간 짓”이더라도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소년이 세상에 널린 책을 다 읽겠다는 욕망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허나 책을 밥 먹듯이 읽으며 살게 되리라고, 그리고 책에 연관된 직업을 갖게 될 거라고 예감했다. 과연 나는 정치인도 기업가도 금융전문가도 아닌, 편집자로 전업 작가로 살았으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활자로 된 건 다 읽어 치우고 마는 게 운명이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 2016년 10월 14일 금요일 저녁, 시인 편집자와 몇 지인이 어울린 서울의 상수동 식당에서 이 책 기획 얘기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단박에 이것을 적는 일이 내 살아 있음을 증거하고, 책을 손에 쥐고 있던 그 찰나 스친 기분과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일임을 알았다. 이 책은 서평집이 아니다. 그간 서평집은 여럿 썼으나 책‘일기’는 처음이다. 읽은 책의 서지학 정보는 물론이거니와 책이 도착한 경로, 날짜와 날씨를 깨알같이 찾아 적으며 책을 끼고 분투하며 산 계절의 뿌듯함과 수고의 기억이 스쳐갔다. 더러는 사사로운 감정의 결들, 이를테면 산 날의 슬픔과 분노, 보람과 덧없음도 얼핏얼핏 드러날 테다. 날마다 책일기를 적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어떤 날은 건너뛰고, 또 어떤 날은 쓰지 못한 날의 일기를 실뭉치인 듯 뒤엉킨 기억을 풀고 펼쳐서 몰아서 썼다. 소년 시절 방학 끝 날 저녁 끼니마저 거른 채 괄약근을 조이며 방학 일기를 끙끙대며 몰아서 해치우듯이. 책일기를 적을 때 내 뇌의 편도체와 해마의 빈곤함에 얼마나 실망했던지! 어떤 책은 읽었건만 까마귀라도 잡아먹은 듯 내용은 커녕 제목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책읽기의 동기는 다양하다. 살아 있음을 자축하는 책읽기, 생업 전선의 필요에 부응하는 책읽기, 취향에 따른 책읽기, 난관을 뚫기 위한 책읽기, 정신의 허기를 채우는 책읽기, 혼자 있음을 견디는 책읽기, 봄날의 벅찬 기쁨을 더하는 책읽기, 정신의 단련과 수행을 위한 책읽기, 침묵 삼매경에 들기 위한 책읽기…… 책일기를 적고 보니, 내 사람됨의 모호함이 보다 또렷해진 느낌이다. 이 일기는 사실에 바탕을 두되 더러 어렴풋한 기억에 픽션을 더해 쓴 것도 있다. 이로 인해 불미스러운 사태와 사회 혼란이 생긴다면 그건 전적으로 내가 감당해야 할 테다. 대통령과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으로 빚어진 나라의 어수선함이 내 집중력을 침해한 것도 사실이다. 가사 의무를 다하느라 일기 쓸 시간이 준 것도 사실이다. 한숨과 탄식을 내쉬며 몰아서 일기를 쓴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것은 늠름한 남자가 취할 자세가 아닐 테다. 약간의 픽션은 픽션대로, 희떠운 소리와 언롱言弄은 그것대로 너그럽게 읽어주시기를! 더러 문장에서 마음의 깊이와 무늬가 아름다웠다면 그것은 책의 훌륭함 때문이고, 흉하게 불거진 사유의 꾀죄죄함과 앙바틈한 도량度量은 내 사람됨의 모자람 때문일 테다.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시의 씨앗을 뿌린 지 어느덧 서른 해가 지났다. 햇수는 옹골차게 채웠으나 묵정밭을 일궈 거둔 소출이 빈곤하고 초라하다. 재주는 얕고 공부도 모자란 데다 뼛속까지 내려가 쓰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갈 길이 먼데, 해가 뉘엿뉘엿 저문다. 하지만 아직도 새벽에 일어나 밥을 끓이며 시 한 줄 끄적거리는 걸 아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죽기 직전에 부르는 노래가 가장 아름답다는 백조를 본받고자 한다.

달과 물안개

...봄날 저문다. 붉은 것은 붉어서 하염없고 땅의 그림자들은 길어져서 덧없다. 어느덧 후회와 사무침이 상처로 깊어진다면, 오, 흠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내 기꺼이 종달새들의 볼륨을 죽이고 침묵으로 견뎌주마. 개미가 먹이를 물어 문지방을 넘는다. 노동으로 생계를 세우고 저를 양육하는 일은 숭고하다. 그 숭고한 길을 따라가려 산문 끝내지 못한 채 무릎을 펴고 일어서다.

독도고래 외뿔이

독도는 과연 누가 지킬까요? 동해바다에 사는 고래 이야기를 들어봤나요? 송창식 아저씨는 오래 전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 쉬는 고래 잡으러.’ 하고 노래했답니다. 어린이 여러분의 아빠 엄마는 다 알고 있는 노래지요, 그럼 부모님은 그때 고래 잡으러 동해로 갔을까요? 기차를 타고 가서 다시 배를 타고 동해바다로 나아가 고래를 만났을까요? 지금 한번 물어보세요. "가고 싶었지. 하지만 못 갔단다. 대신 가슴에 예쁜 고래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단다. 지금도 그 고래를 키우고 있지." 하는 소리를 어쩜 들을 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다 읽은 어린이는 아빠 엄마에게, 그 고래가 혹시 독도고래 상괭이 아니냐고 물어 볼 수도 있겠죠. 상괭이는 고래 중에서도 덩치가 작고 힘도 약한 그런 고래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머리에 뿔이 하나 나 있답니다. 원래는 상처였던 곳이 흉터가 되었고 그 흉터가 뭉쳐 그만 뿔이 되고 만 거지요. 그렇다면 그 뿔은 아무 소용없는 흉터에 불과할까요? ....... 위험에 빠진 독도를 과연 누가 지킬까요? 지킨다면 어떻게 지킬까요? 이제부터 못나고 놀림 받던 외뿔이가 어떤 엄청난 모험을 겪는지, 어떻게 금뿔 용사가 되어 독도를 지키게 되는지 그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비밀 하나만 말하자면 아저씨는 직접 독도를 갔다 왔답니다. 그리고 외뿔이와는 친구 사이랍니다. 과연 외뿔이가 여러분의 친구도 될 수 있을까요? 다 읽고 나서 대답해주겠다고요. 좋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리겠습니다.

들뢰즈, 카프카, 김훈

이 책은 거시담론의 시대에서 미시담론의 시대로 꺾어져 들어오며 급격하게 그 내면에서 고갈의 위기에 빠진 주변문학이자 소수어 문학인 한국문학을 새로운 시선으로 읽고, 나아갈 새 길을 찾기 위한 모색 끝에 탄생한 것이다.

만보객 책속을 거닐다

꽃피고 새가 우짖는 섬에서는 뭍의 번잡과 흥망성쇠, 변해가는 날씨나 소문 따위에 휘둘리지 않아도 좋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자유 속에 방치된다. 그 한가로움과 무위 속에서 때로 놓친 끼니를 찾아먹듯 묵언을 하고 명상을 하면 그게 곧 피정이다. ...책읽기는 어디에서 이루어지든지 간에 그 장소를 피정의 장소로 정화한다.

비주류 본능

세상을 바꾸는 건 주류가 아니다.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비주류가 세상을 바꾼다. 주류는 세상이 바뀔까 봐 두려워한다. 세상이 바뀔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위기라고 떠든다. 비주류가 세상을 바꾸었다고 비주류가 세상의 중심이 되지는 않는다. 비주류는 세상의 바깥으로, 변두리로 나간다. 비주류가 중심에 있으면 혼란과 불안만 커진다. 비주류는 바깥에 있을 때만 비주류다. 비주류는 혁명의 동력이 나오는 근원이다. 비주류는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다. 비주류 본능은 내 힘, 내 경쟁력이다. 나는 당당한 비주류다.

소설

소설쓰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소설을 읽고 쓰는 것을 즐겨야 하고, 소설쓰기를 향한 그치지 않는 열정과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 재능이란 그것과 정확하게 비례하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1인분의 고독’에서 ‘2인분의 고독’으로 1인분의 고독 당신이 보인 뜻밖의 사적인 관심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관례적 방식을 빌리기는 했지만, 당신의 ‘사랑한다’는 고백에 놀랐어요. 그리고 기뻤습니다. 잎을 가득 피워낸 종려나무, 바다에 내리는 비, 그리고 당신. 그것은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의 목록이에요. 기름진 경작지 같은 당신의 황금빛 몸, 물방울처럼 눈부시게 튕겨오르는 당신의 젊은 사유, 서늘한 눈빛을 상상만 해도 나는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사랑이라니! 와디를 아시는지요. 사막의 강, 우기 때 물이 흐른 흔적만 남아 있는 메마른 강. 난 그런 와디나 다름없어요. 누구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인색하고 협량한 마음의 와디. 당신이 흐르는 강물이 되어 이 협량한 마음의 와디를 가득 채우고 흐르길 오랫동안 꿈꾸었지요. 당신의 강물로 내 죽은 뿌리를 적시고, 마침내 잎과 꽃을 피워내고 열매 맺기를 꿈꾸었지요. 아아, 하지만 나는 그걸 흔쾌히 수락할 수 없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과실을 깨물어 그 넘치는 과즙의 열락을 맛보고 싶은 욕망이 없는 건 아니에요. 몇 날 며칠의 괴로운 숙고 끝에 당신의 사랑을 거절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부디 거절의 말에 상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미 낡은 시대의 사람이고, 그러니 당신이 몰고 오는 저 야생의수목이 뿜어내는 신선한 산소를 듬뿍 머금은 공기에 놀라 폐가 형편없이 쪼그라들지도 모르죠. 그러니 나를 가만 놔두세요. 더 정직하게 말하죠. 나는 오랫동안 혼자 잠들고, 혼자 잠 깨고, 혼자 걸어다니는 저 1인분의 고독에 내 피가 길들여졌다는 것이죠. 나는 어둠 속에서 1인분의 비밀과 1인분의 침묵으로 내 사유를 살찌워왔어요. 고갈과 메마름은 이미 생의 충분조건이죠. 난 사막의 모래에 묻혀 일체의 수분을 빼앗긴 채 말라가는 전갈이죠. 내 물병자리의 생은 이제 1인분의 고독과 1인분의 평화, 1인분의 자유를 나의 자연으로 받아들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거기에 서 있으면 됩니다. 어느 해 여름 우리는 바닷가에서 쏟아지는 유성우를 함께 바라봤지요. 그때 당신과 나의 거리,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그 거리를 유지한 채 남은 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2인분의 고독 ‘1인분의 고독’에 웅크려 있던 내 내면을 들여다보니, 거기 두려움이란 짐승이 불안한 눈동자를 하고 숨어 있더군요. 짐승의 눈에 겁이 잔뜩 들어 있어 가엾었어요. ‘1인분의 고독’을, 그 자유와 고요를 잃을까봐 두려웠던 것이지요. 이제 망설임을 떨치고 용기를 냅니다. 사랑이라고 해도 좋아요. 어떤 사이프러스 나무도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래서 ‘2인분의 고독’을 덥썩 받아 품습니다. 사랑이란 ‘2인분의 고독’을 뜨겁게, 늠름하게 받는 거예요. 생의 찬란한 순간들을 함께할 사랑하는 P와 이 멋진 책을 결혼 선물로 만들어준 김민정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2015년 12월, 서교동에서

이 사람을 보라

길 밖의 길을 외롭게 걸어간 사람들. 시대를 너무나 앞질러 가버린 자들. 지고한 혼의 외길. 그 고투. 주류의 삶에 대한 그 기꺼운 거부와 저항. 그 '하염없는 반주류'의 삶을 살다 간 그들의 생 들여다보기. 무엇인가, 그들을 그렇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든 그 필연의 내적 동인은. 내가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의 궤적들 속에서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생의 궤적을 쫓아가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그 낯선, 너무나 낯선, 혹은 아름다운 너무나 아름다운이라고 말해도 좋을 그들의 일탈, 혹은 이단의 생과 함께 동행하는 동안 우리 삶의 누추함을 잠시 접어놓아도 좋다. 아주 짧았지만 내가 향유했던 행복한 느낌이 우연히 이 책을 손에 쥐게 된 미지의 독자들에게도 가차없이 전염되고 무차별적으로 범람하기를 바란다.

절벽

시의 씨앗을 뿌리고 거둔 지 어느덧 서른 해가 넘는다. 비릿함도 가시지 않은 이른 나이에 시작한 일이 귀밑머리 희끗한 오늘에 이르렀으니 아득한 세월이다. 햇수는 옹골차게 채웠으나 소출은 빈곤하고 보람도 초라해서 벽에 머리를 찧기 일쑤다. 재주가 얕고 공부가 깊어지지 못한 탓이다. 갈 길이 먼 데,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발아래 그림자가 길어진다. 아직도 나는 시의 위리안치에 갇혀 있다. 날마다 새벽이면 일어나 밥을 끓이고 명상을 한 뒤 시 한 줄 끼적인다. 쉬임없이 쓰면서 죽기 직전 노래가 가장 아름답다는 백조를 덧없이 꿈꾸어 볼 일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여기 닮아 있지만 다른 '얼굴들'이 있다. 나는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유적을 탐사하듯이, 행성처럼 확고 부동한 삶의 역사를 만들어간 그들의 삶을 탐사한다. 우리의 얼굴과 닮아 있지만 동시에 다른, 창조적 소수의 얼굴들. 이 책은 원본으로서의 삶을 보여줬던, 순도가 높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그 '얼굴들'에 관한 책이며, 그 얼굴들에 새겨진 매혹적인 영혼의 지리학이다. 나는 이 책이 '동시대'의 천박함에 감염된 우리 혈관 속에 무적의 항체를 심어주는 위안과 고통의 책으로 읽혀졌으면 좋겠다.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일자무식 선사 혜능慧能만이 내 스승이다 혜능은 책 한 권 읽지 않고 단숨에 책의 바다를 건너갔다. 미천함을 딛고 미천함을 넘어간 것이다. 혜능은 스스로 피운 불길에 제 일자무식의 존재를 불태우고 재가 되었다. 혜능은 재가 된 다음에 재 속에서 새롭게 일어서 사람이다. 꿈같은 일이다. 책 앞에서 나는 굶주린 손님이었다. 늘 염치불구 허겁지겁이었다. 무슨 착오가 있었던가. 내 유산의 상속권을 박탈당한 채 굶주린 사람으로 나는 이 세상에 초대를 받았다. “굶주린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식사라도 음미하려 하지 않는다. 그에게 빵 한 조각과 고풍스런 만찬은 단지 배를 채워 준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그 때문에 까다로운 예술가는 굶주린 손님을 식사에 초대하지 않는다.”(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오로지 굶주림만이 내 번뇌력의 근원이고 내 여여(如如)함의 내역이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책들이 있다. 내가 읽은 책들과 내가 읽지 않은 책들. 내가 읽은 책들은 다시 세 가지로 나뉜다. 산 책, 빌린 책, 훔친 책. 그 세 가지의 책들을 핥고, 물어뜯고, 씹고, 갈아 마셨다. 그것들은 내가 먹은 밥, 내가 마신 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느덧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엄정하게 말하자면 책읽기에의 힘씀은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생존력의 퇴화, 그리고 피안은 점점 멀어진다. 그래도 숨결 이어지는 동안에는 이 근면과 열등함을 유지하려 한다.

진리는 미풍처럼 온다

지금도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라는 구절을 읽을 때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우는 것 같다. 니체와 함께 하는 동안 몸은 늙고 쇠락할지 모르지만 천진난만과 망각으로 나아가는 내 정신은 나날이 새로워진다. 나는 아직 젊은이다.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가며 점점 더 어린아이가 된다.

책은 밥이다

일찍이 영혼이 고매하였다면 책 따위는 읽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이 고요하여 욕심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무엇 때문에 눈이 침침해지고 어깨가 뻐근해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책을 읽는단 말인가? 책읽기는 시간과 돈이 드는 일이며, 많은 기력을 소비하는 일이다. 나는 여전히 어리석기 때문에 두루 책을 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애써 구한 것은 마음을 다독이며 부지런히 읽는다. 따로 사시는 늙은 어머니가 이런 모습을 며칠 지켜본 뒤 "참, 고단한 삶을 산다."고 탄식했지만 이는 순전히 자발적인 것이다. 내가 책에서 일차적으로 구하는 것은 타자와의 소통, 지적 충일감, 인식의 확장일 것이다. 책은 궁극적으로 내 안의 욕망과 질료적 흐름에 작용하여 새로운 운동과 속도들을 만들고 질적 전환과 생성으로 나아가게 한다. 더운 밥과 찬 술을 구하듯 매일 책을 찾아 읽으며 조금씩 진화해서 온유한 인격을 갖게 되리라 믿는다.

풍경의 탄생

질풍노도와 같은 이십대 전반기의 내 삶을 상징과 제유 속에 압축하고 싶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고,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꿈에서도 늘 절벽을 보았던 한 청년의 변방의 삶, 휘어지는 빛, 우연, 어처구니없는 자명성,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여자들이 당당하게 내민 뾰족한 젖가슴들, 바다에 떨어지며 녹아드는 눈발, 눈 녹아 질척거리는 지저분한 골목길들, 둥근 감자의 눈에서 나오는 노란 싹들, 누렇게 변색되어 끝이 부스러지던 책들... 나는 그것들에 대한 애기를 쓰고 싶었다.

햇빛사냥

... 사라지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그런 사라짐의 운명을 거스르며 <햇빛사냥>이 세 번째로 세상에 나온다. 물론 그것은 인위의 작용 탓이다. 적벽 아래서 담백하고 조촐한 밥을 구하며 사는 사람에게 이 일이 기쁜 일인지, 아닌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세 번씩이나 세상에 나오는 게 이 시집의 운명이라면 담담하게 받을 뿐이다.

햇빛사냥

초판 시인의 말 1 ―『햇빛사냥』에 부쳐 시는 하나의 존재 양식, 은유적 몽상, 자기 확인, 존재가 적나라하게 현현하는 공간, 자기 삶의 객관화 작업, 초월, 일종의 꿈, 끝끝내 논리적 해명을 거부하는 구석으로 남기를 원하는 불립문자, 추억이 사는 사원, 암호, 신화의 모태이다. 1975년은 아주 스산했다. 세계는 거대한 의문의 덩어리 그 자체였고, 나는 生 의 궁극적인 점에 대한 회의의 병을 깊이 앓았다. 감당하지도 못할 파토스적 고뇌를 안고 쩔쩔맸다. 나는 상처받은 영혼이었다. 이 시집을 관류하는 스산하고 어둡고 절망적인 분위기는 그러한 내 정신의 사정과 관련이 있다. 나의 경우 시를 쓴다는 것, 혹은 시집을 낸다는 것은 삶을 객관화시켜 보고 싶은 은밀한 욕망의 한 표현이다. 이 시집을 내 젊은 날의 쓰라렸던 정신의 편력과 모험으로 읽어주셨으면 한다. 지난 1978년도 아주 스산했다. 그러나 좀더 밝은 날들에 대한 희망은 포기할 수 없다. 1979년 4월 장석주

햇빛사냥

초판 시인의 말 2 ―『완전주의자의 꿈』에 부쳐 지금은 어린 나의 두 아들 청하, 준하 형제에게 너희들이 성장하여 인간과 세계에 대한 더욱 전체적이며 포괄적인 ‘이해의 틀’을 갖고자 고뇌하기 시작할 때, 너희들의 젊은 아버지가 이 대지 위에 어떤 生 을 건축하고자 주어진 조건들과 싸웠는가, 또 짧고 짐승스러우며 비천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일회적인 生 으로 무엇을 극복하고자 애썼는가를 하나의 ‘참조의 틀’로 보여주고 싶다. 아울러 ‘전체성’이 파괴된 세계 속에서 유토피아적 전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한 완전주의자가 어떻게 그 균열과 파괴를 딛고 일어서서 세계와 자아, 현실과 전망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려고 했는가, 그 외로운 혼의 열망과 지향의 고통스러운 궤적에 대한 너희들의 넓고 깊은 이해를 기대하고 싶다. 1981년 여름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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