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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안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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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근대문학, 생명을 사유하다>

천사의 허무주의

이 책의 내용을 구상하면서 ‘시인의 존재론’을 다루어보겠다는 나름의 담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여느 위대한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위대한 시인들에게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겪지 못하는 것을 겪어내는 존재의 방식이 있다고 믿는다. 과연 192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허무주의 계보를 훑으며 시인들의 삶 자체가 하나의 작품임을 절감하였다. 이들은 자기 삶의 매 순간을 충만한 시간으로 수놓으며 개체적 자아를 넘어 존재론적 비약을 보여주었다. 시인들은 꽃이자 풀이자 나무였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이었다가 그 미풍에 흩날리듯 날아가는 나비가 되었다. 이들의 시는 그렇게 자연과 문명, 삶과 죽음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과 세계 사이의 복잡한 관계망이 회복된 아름다운 순간들과 만나게 해주었다. 나는 이와 같은 시인의 존재론이 허무주의라는 공통된 세계관과 더불어 전개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허무주의는 무엇보다 ‘역사적인 것’에서 ‘비역사적인 것’으로의 전회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미학이다. 허무주의를 부정적으로 인식해온 이들에게 이와 같은 접근은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책에서는 이를 김춘수의 표현을 살짝 빌려와 ‘역사허무주의’로 구체화하였다. 그러니까 이것은 삶에 대한 의욕이 없는 금욕주의적 허무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옭아매는 역사를 부정하고 삶을 더 욕망하게 되는 허무를 말함이다.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라고 자임하는 ‘근대적 개인’이 역사의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역사허무주의는 역사의 노예로 살아온 삶을 해방시켜 존재의 비약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비역사적인 것’의 지평 안에서 삶을 꾸려간다는 것이 시인들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벤야민이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에서 포착한 천사의 모습은 시인들의 자화상이기도 하였다.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시간을 균질적이고 공허한 것으로 만들며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하는 역사의 폭풍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천사에 대해 묘사한 바 있다. 이러한 천사의 모습은 진보에 대한 믿음을 고수하느라 역사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에 대한 비유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벤야민이 인용한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역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지식의 정원에서 소일하는 나태한 자가 필요로 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어쩌면 역사가 폐허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천사는 폭풍을 뚫고 충만한 시간을 되찾게 해줄 ‘작은 문’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그러한 천사의 소임을 맡아준 것이 니체의 철학이었다. 니체는 역사의 폭풍에 휘말리는 순간들마다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너는 새로운 꽃을 피울 수 있는가’라는 니체적 명제는 변증법적 역사철학에 대한 선전포고라 할 수 있다. 그는 인간들이 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겪게 되는 불행을 상기시키며 비극과 웃음과 사랑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나는 이 책에서 이와 같은 니체의 명제를 구현해낸 시인들이 역사라는 폐허에 피워낸 다채로운 꽃밭을 펼쳐 보이고 싶었다. 이들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왜소함에 비애를 느끼고 좌절할 때 나 역시 허무한 슬픔을 느꼈다. 이들의 절망은 깊었고 다시는 날개를 펼 수 없을 것처럼 보일 때조차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시를 읽으며 비애를 뚫고 넘어갈 수 있는 힘이란 바로 그 비애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웃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니체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니 시인의 슬픔은 결코 나약함의 증표가 아니다. 역사허무주의는 역사에 대한 패배 선언이 아니라 역사 따위는 진정한 싸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거대한 긍정이다. “맛없는 울음”(오장환, 「연화시편」)을 울며 역사를 짊어지고 느릿느릿 기어가는 거북의 아릿한 슬픔 속에서 천사는 아름다운 비상을 보여준다.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불어넣어주십시오”라는 릴케의 간절한 기도에서 알 수 있듯이 무르익은 슬픔은 삶을 성숙하게 한다.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죽음에 대한 소망은 죽음마저 축복할 만한 것으로 변용시킨다. 해서, 「두이노의 비가」에서 릴케는 이렇게 노래한다. “몰락조차도 그에겐/존재를 위한 구실, 최후의 탄생에 불과했나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와 릴케의 천사의 동일성을 지적한 하이데거의 명민한 통찰처럼, 니체의 철학 못지않게 이 책의 버팀목이 되어준 것이 릴케의 시이다. 시인들이 절망에 빠져 있던 순간마다 영혼의 피난처를 마련해주었던 것처럼, 릴케는 이 책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틀어막혔던 입에서

책머리에 이렇게 참담한 마음으로 서문을 시작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문단에서의 경력이 쌓일수록 무력감과 열패감만 늘어 가는 것 같다. 2015년 표절 사태와 2016년 10월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2018년 2월 미투 운동을 통해 한국문학계에도 일정 정도 자정의 계기가 마련되었으리라 예상한 것은 오판이었던 모양이다. 2020년 2월, 이상문학상의 불합리한 저작권 계약 관행에 문제를 제기한 윤이형 작가가 절필을 선언하고, 7월에는 당사자의 동의를 받지 않은 창작으로 문제가 된 김봉곤 작가의 ?그런 생활?과 해당 작품을 출간한 문학동네와 창비의 부적절한 대응이 논란을 일으켰다. 이렇게 이슈화된 일련의 사태들이 아니더라도 나는 문단 내 적폐가 청산되지 못한 현실을 순간순간 체감하였다. 성폭력 가해자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세력들이 의외로 적지 않았고, 문학?출판계의 잘못된 ‘관행’ 역시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평 활동을 하는 내내 나도 모르게 내가 비판하는 비윤리적 구조에 연루되어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공포감과 싸워야 했다. 2014년 등단할 당시 나는 세 명의 시인을 묶어서 주제론을 발표했는데, 그중의 한 시인이 2016년 성폭행을 시도했다는 폭로 이후 문단을 떠났다. 이 시인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남성 작가, 평론가들의 이름이 언론과 SNS에 오르내렸고, 문단에서는 피해자가 전면에 나서지 않은 이들 가운데도 곤란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특정인의 문제가 아니라 문단 전반의 반성과 변화가 필요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문제를 제기한 피해자 및 피해자와 연대한 이들이 문학을 버리고 떠난 이후에도 가해자들은 여전히 문단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 가해자를 옹호하며 2차 가해를 하거나 슬슬 주변의 눈치를 보며 가해자를 다시 문단에 불러내려는 이들로 인해 잡음이 끊이질 않는다. 시효 만료된 문학을 붙들고 과거로 역행하려는 세력은 공고하고, 무엇보다 어디까지를 적으로 돌려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지쳐 간다. 그 모든 연대와 선언과 투쟁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단의 백래시(backlash)는 현재진행형이다. 2020년 7월은 공교롭게도 한국 사회 전반의 분위기 역시 한국문학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보여 준 시기였다. 7월 6일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의 미국 송환이 불허된 날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모친상 빈소에 정치인들의 근조 화환이 늘어선 풍경을 마주해야 했던 날이기도 하였다. 이날만 해도 정신을 온전히 붙들고 있기가 어려웠는데, 고작 삼 일 후에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성추행 피소 후 죽음을 택했다.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리트머스 시험지라도 되는 양 이 사태에 대한 반응을 통해 여성 문제에 대해 시대착오적이고 그릇된 태도를 지닌 일군의 세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인이 소속된 민주당의 대표는 성추행 의혹 대응 여부를 묻는 데 ‘예의’가 아니라며 도리어 화를 냈고, 50만 명을 훌쩍 넘긴 청와대 청원 동의와 코로나 19 전염병 사태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대규모의 추모 의례는 죽은 후에도 지속되는 위력을 실감케 했다. 성범죄에 대한 미온적인 처벌과 가해자 감싸기가 반복되면서 안전하고 인간답게 살아갈 최소한의 권리조차 부정당했다는 모욕감과 분노, 절망감은 한국 여성의 공통감각이 되었다. 이 나라는 여성들이 지르는 비명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과 2018년 미투 운동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지극히 선별적이고 차별적으로 작동한다. ‘K방역’에 대한 외신의 보도에는 우쭐하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코로나’가 아니라 ‘성폭력’ 팬데믹을 조심해야 할 판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의 역사에서 여성의 존재가 삭제된 것과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권을 탄핵하고 ‘촛불 민심’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도 여성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는 것 같다. 현 정권을 주도하고 있는 이들이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의 기억을 ‘훈장’처럼 달고 있는 장본인들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납득이 되기도 한다. 소위 586이라 불리는 1960년대생 엘리트 남성들은 한국 사회에서 도덕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을 뿐더러, 한국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수혜를 입고 “학력과 전문지식, 직업, 경제적 지위가 맞물린 테크노크라트에 가까운 집단을 대규모로 창출”한 상태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계층 지위를 자식들에게 세습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다는 점에서 ‘불평등한 민주주의’라는 불가능한 이상향을 지향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1980년대적 진정성은 진정성대로 폐기 처분하지 않으면서 성공과 치부(致富)를 추구하는 이중적 면모를 보인다. 김은하는 이들이 “공적인 자기와 사적인 자기의 괴리를 좁힐 수 없어 위장과 가면 쓰기에 능하거나, 속으로는 깊은 분열을 겪는 병리적 인간의 계보에 속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성’은 1980년대라는 이념의 시대가 추방했던 욕망 혹은 억압된 무의식이 귀환한 증거”로, 이들 세대가 여성 혹은 여성성을 신성한 대의를 위협할 수 있는 세속적 욕망으로 분류하면서 감시 혹은 억압의 대상으로 삼아 왔던 까닭을 설명해 준다. 분열적 양상을 띠는 진정성 레짐이 한국문학을 지탱해 온 주요 기제였다는 사실은 불행한 진실이다. 김홍중에 따르면, 1980년대적 진정성은 “개인의 충분한 성찰에 근거한 사회운동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책무나 책임의식이 선행하면서 개인들을 도덕적으로 동원하는 양상을” 띠었고, 이에 따라 권위주의적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체들을 대량으로 양산해 냈다. 이는 문학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 비단 1980년대에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문학사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이분법으로 구분해 온 오래된 ‘관행’은 다분히 도덕적으로 선한 ‘우리’와 그렇지 않은 ‘저들’로 이분화하여 후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식으로 귀결시켜 온 유구한 이분법적 세계관에 근거한다. 마찬가지로 1990년대 문학사를 ‘내면으로의 침잠’이 두드러진 ‘여성문학’이 융성한 시기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들 중에는 여성을 ‘비정치적 주체’로 단정 지으며 ‘여성문학’을 비하하려는 의도를 은연중에 표명하기도 한다. 우리가 이런 유의 문학(사)과 작별할 수 있게 된 것은 주지하듯 ‘페미니즘 리부트’의 영향 덕분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문학사를 탈구축하는 기획들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었던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시각을 교정할 수 있게 되었다(이 책 역시 이들 기획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근대문학의 종언을 외쳤던 이들은 이런 식으로 한국문학(사)의 부흥이 가능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령 최근에 읽은 최은영의 ?몫?(2018)은 배제되었던 여성들의 투쟁의 역사를 불러오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폭력으로 인식되지도 못했던 시절의 지난한 싸움을 그려 내고 있다. 1996년 고대생들의 이대 난입?난동 사건, 교수 성희롱 문제, 가정 폭력, 기지촌 여성 문제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이 만연한 현실을 문제 삼으며 해결을 모색한 정치적 주체는 여성이었다. 2010년대 한국문학의 가장 큰 성취는 주변화되었던 주체들의 목소리를 복원시킨 것과 더불어 신성시되었던 문학-문학성에 의문을 품고 재현의 윤리를 재정립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가치가 한 사람의 삶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김초엽 소설가의 말은 한국문학이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해 준다.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서 확인되듯, 피해자와 연대하며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에 저항하고자 한 이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강요를 당하던 이들이었다. 2016년 발표된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생 연대 ‘탈선’의 성명서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고발자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앗아간 ‘문학’은 어디에 있는가. 가해지목인이 자신이 저지른 폭력을 엮어 시집을 출간할 때, 가해지목인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 ‘문학’은 어디에 있는가. 문학이라는 이름, 그것이 오로지 가해지목인이 고발자와 피해자들을 성적 착취하는 수단이자 명목으로 다루어졌다. 누가 문학을 자기 목소리의 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목인의 목소리는 증폭되었고, 우리의 목소리는 침잠했다. 이에 우리는 분노한다. 왜 우리는 문학성을 정의받아야 하는가.” 이들의 용기 있는 고발 덕에 우리는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폭력을 직시하고 폭력을 용인.은폐.재생산하는 데 기여했던 ‘문학성’과 단절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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