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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제임스 빌링턴 (James Hadley Billington)

국적:아메리카 > 북아메리카 > 미국

출생:192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쌍둥이자리)

최근작
2018년 5월 <러시아 정체성>

제임스 빌링턴(James Hadley Billington)

우드로윌슨국제학술센터 소장을 거쳐(1973~1987) 제13대 미 의회도서관장(1987~2015)을 지낸 미국의 권위 있는 러시아 연구자. 프린스턴대학교 졸업 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하버드대학교와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러시아사를 강의하였다. 러시아학술원 외국인 회원이기도 하며, 러시아 역사·문화·정치에 관한 다수의 수준 높은 저서들을 집필하였다. 대표 저서로 러시아 문화사 연구의 고전이 된 『이콘과 도끼』(The Icon and the Axe, 1966)를 비롯하여 『인간들 가슴속의 불꽃』(Fire in the Minds of Men, 1980), 『러시아의 얼굴』(The Face of Russia, 1998) 등이 있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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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이콘과 도끼 1> - 2015년 2월  더보기

이 책은 근대 러시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한 해석 위주의 역사서이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연구와 숙고와 특수한 관심의 산물이다. 러시아의 유산의 백과사전식 목록을, 또는 그 유산을 이해하는 어떤 간단한 비결을 내놓겠다는 망상은 없다. 그러겠다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이 책은 이미 이루어져 있는 합의를 잘 정리하기보다는 새로운 정보와 해석을 내놓고자 하는, 즉 이 엄청난 주제를 “망라”하기보다는 터놓고 이야기해 보려는 선별적 서술이다. 고찰 대상이 되는 시대는 러시아가 강력하고 독특하고 창조적인 문명으로 떠올랐던 시기인 최근 600년이다. 러시아 문화의 위업과 더불어 고뇌와 포부가, 과두 지배체제와 더불어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반대파가, 시인과 정치가와 더불어 사제와 예언자가 이야기될 것이다. 개개의 문화 매체나 유명 인물의 모습을 완전하게 그려내려는, 또는 한 특정 주제에 바쳐진 일정 분량의 낱말을 고유한 문화 특성의 필수 색인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저작은 각각의 러시아 문화발전기의 독특한 핵심적 관심사를 가장 잘 예증한다고 보이는 자료를 활용할 것이다. 러시아인에게 영속적 의미를 지니는 - 이콘과 도끼라는 - 두 물품을 제목으로 골랐다. 이 두 물건은 숲이 많은 러시아 북부에서 전통적으로 농가 오두막의 벽에 함께 걸려 있었다. 이콘과 도끼가 러시아 문화에 지니는 의미는 이 책의 첫 부분에서 설명될 텐데, 이 두 물건은 러시아 문화의 이상적 측면과 현세적 측면 양자를 시사하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모든 인류 문화에 나타나는 신성과 마성 사이의 영원한 분열은 러시아의 경우에는 거룩한 그림과 거룩하지 못한 무기 사이의 그 어떤 단순한 대비로도 제공되지 않는다. 협잡꾼과 선동정치가가 이콘을, 성자와 예술가가 도끼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에 이 두 시원적인 물품에 맞춰지는 초점에는 우리가 러시아 문화의 고찰을 끝마칠 때 가지게 될 아이러니한 전망을 일러주는 실마리가 들어있다. 이 책의 제목은 이 책이 주로 서방의 사상과 제도와 예술양식의 관점에서 러시아의 현실을 살펴보기보다는 러시아의 상상력에 독특한 역할을 했던 상징물을 찾아내어 그 기원을 더듬어 찾아가는 시도를 할 저작임을 시사하는 구실도 한다. 이 저작에서는 러시아인이 두호브나야 쿨투라라고 일컫는 관념과 이상의 세계가 강조된다. 이 세계는 파악하기 어려우며, 두호브나야 쿨투라는 영어의 등가어인 “영적 문화”보다 종교를 머릿속에 떠오르게 만드는 힘이 훨씬 더 약한 용어이다. 이 저작의 취지는 이념을 경제적인 힘과 사회적인 힘에 체계적으로 연계하거나 역사에서 물질적인 힘과 이념적인 힘이 지니는 상대적 중요성이라는 더 심오한 문제를 예단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저작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СССР)의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자들까지도 자기 나라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했다고 인정하는 정신적인 힘과 이념적인 힘의 역사적 정체를 더 충실하게 알아내고자 할 따름이다. 이 저작은 사람들이 자주 찾아가지만 지도에는 잘 나오지 않는 사상과 문화의 지형을 위한 개설적 역사 안내서를 제공함으로써 번번이 정치사와 경제사에 집중되는 현상을 얼마간 상쇄하려고 시도한다. 여기서 “문화”라는 용어는 “독특한 성취물과 신앙과 전통의 복합체”라는 넓은 의미로 쓰이지, “문화”가 더 높은 문명 단계 앞에 있는 사회 발달의 초기 단계로, 또는 박물관에서 함양되는 고상한 취미라는 소양으로, 또는 구체적 맥락에서 완전히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성취로 가끔 이해되는 더 특화된 의미 그 어떤 것으로도 쓰이지 않는다. “민족이나 국가의 활동에서 사회적ㆍ지성적ㆍ예술적인 측면이나 힘에 집중하”는 문화사라는 일반 범주 안에서 이 저작은 - 사회사는 부수적으로만 다루고 사회학적 분석은 전혀 다루지 않으면서 - 지성적이고 예술적인 측면이나 힘을 강조한다. 이 연구의 기본 얼개는 경제사나 정치사에서만큼이나 문화사에서도 중요한 연대순 배열이다. 잠깐 뒤로 가서 앞 시대를 되돌아보기도 하고 앞으로 가서 뒷시대를 미리 들여다보기도 할 것이다. 배경이 될 제1장에서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주요 관심사는 그다음 장들에서 연속적인 러시아 문화발전기의 연대기적 서술을 내놓는 것이다. 제2장은 16세기와 17세기 초엽의 시원적인 모스크바국과 서방의 초기 대립을 묘사한다. 그다음에 한 세기씩 담당하는 두 개의 긴 장이 나온다. 제3장은 급성장하던 17세기와 18세기 초엽의 러시아 제국에서 새로운 문화 형식이 오랫동안 추구되는 양상을 다루고, 제4장은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꽃을 피운 거북할지언정 화려한 귀족 문화를 다룬다. 제5장과 제6장은 산업화와 근대화라는 문제가 러시아 문화 발전의 더 앞선 유형과 문제 위에 얹혀진 마지막 100년에 할애된다. 제5장은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기 동안 시작된 매우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시기를 다룬다. 마지막 장은 20세기 러시아 문화를 과거의 러시아 문화에 연계해서 살펴본다. 대다수 러시아 문화에는 일치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개개 러시아인과 각각의 예술양식이 어느 모로는 공동의 창조적 추구나 철학 논쟁이나 사회 갈등의 부차적 참여자라는 느낌이었다. 물론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의 화학, 니콜라이 로바쳅스키의 수학,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바실리 칸딘스키의 회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모두 다 그들의 러시아적 배경에, 또는 특정한 과학 체나 예술 매체의 기준 이외의 다른 기준에 비교적 적게 대조하고서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러시아 문화는 - 사실은 참으로 유럽적인 이 인물들이 만들어낸 대다수 문화는 - 러시아의 맥락에 놓일 때 부가된 의미를 획득한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다른 많은 민족 문화의 경우보다 각각의 창조적 활동의 민족적 맥락의 일정한 이해가 더 필수적이다. 함께 연루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이런 느낌의 결과로, 서방에서는 흔히 개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유의 논쟁이 러시아에서는 자주 개인 안에서 훨씬 더 격렬하게 벌어졌다. 많은 러시아인에게 “생각하기와 느끼기, 이해하기와 괴로워하기는 같은 것”이며, 그들의 창조성은 “원초성이 대단히 강하고 형식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을 자주 입증해준다. 성 바실리 대성당의 색다른 외형,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한 곡의 파격적 화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한 편의 진한 구어체는 고전주의 정신에 거슬렸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다수 사람에게 크나큰 감동을 주며, 그럼으로써 형식의 결핍이라고 하는 것이 한 문화를 분석하기 위해 쓰이는 전통적 범주에 들어맞지 않는 데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점을 우리 머릿속에 떠올려준다. 러시아 문화의 역사를 바라볼 때, 문화 이면의 형식보다는 힘들을 생각하는 것이 유익할지 모른다. 특히 - 자연환경, 그리스도교의 유산, 러시아와 서방의 접촉이라는 - 세 힘은 이후 이 책의 지면에 당당하게 부단히 나타난다. 이 세 힘에게는 인간의 노력을 재료 삼아 위기와 창조성이라는 그 나름의 이상한 거미줄을 짜는 능력이 있는 듯하다. 비록 그 세 힘이 - [의사 지바고]에서 나타났다 금세 사라지는 몇몇 순간에서처럼 - 가끔 모두 다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일지는 몰라도, 대개 그 힘들은 어긋나서 따로따로 작용하고 있다. 첫째 힘은 자연 그 자체의 힘이다. 러시아의 사상가는 정식 철학자가 아니라 시인이라는 말이 있었다. “시”와 “자연 원소”를 가리키는 두 러시아어 낱말(스티히(стихи), 스티히야(стихия))이 겉보기에는 우연히도 비슷하다는 것 뒤에는 러시아 문화와 자연계 사이의 긴밀한 여러 연계가 있다. 어떤 이들은 러시아 땅에서 스키탈레츠(скиталец), 즉 “떠돌이”가 되고 싶은 어수선한 충동이 땅과의 “대지적”(大地的) 일체감과 번갈아 나타난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이들은 “나는 여기가 따듯하다”는 이유로 낳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태아가 나오는 시에 있는 러시아 특유의 혜안을 이야기한다. 신화에 나오는 “촉촉한 어머니 대지”의 땅 밑 세상은 키예프의 동굴에 있는 최초의 수도원에서 시작해서 방부처리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을 모셔놓은 오늘날의 성소(聖所)와 겉치레한 카타콤인 모스크바 지하철에 이르는 많은 형태로 사람들을 꾀어왔다. 땅뿐만 아니라 - 중세 우주론의 다른 “자연 원소”인 - 불과 물과 하늘도 러시아의 상상력을 위한 중요한 상징이었다. 심지어는 오늘날에도 러시아어에는 유럽의 더 세련된 언어에서는 걸러져 사라진 토속적 함의가 많이 남아있다. 근대 러시아 문화의 배후에 있는 초인격적인 둘째 힘은 동방 그리스도교라는 힘이다. 토착종교의 잔존 요소가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상고 시대 스키타이인의 예술이 아무리 대단해도, 최초의 러시아 고유문화를 만들어내고 예술 표현의 기본 형식과 신앙 구조를 근대 러시아에 제공한 것은 정교였다. 또한, 정교회는 특별한 존엄성과 운명이 한 정교 사회에 있으며 그 정교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논쟁에는 정답이 딱 하나 있다는 기본적으로 비잔티움적인 사고에 러시아를 물들이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 종교는 - 문화의 격리된 한 양상이 아니라 문화 안에서 모든 것에 스며들어 가는 하나의 힘으로서 - 중심 역할을 할 것이다. 자연과 신앙과 나란히 셋째 힘인 서방의 충격이 있다. 이 연대기의 전체 기간에 서유럽과의 상호작용은 러시아 역사에서 한 주요 요인이었다. 러시아인은 이 관계를 정의하려는 시도를 거듭하면서 공식 하나를 늘 찾았다. 그 공식으로 러시아인은 서방에서 문물을 빌릴 수 있으면서 서방과 구별되는 상태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1840년대에 친슬라브주의자와 “서구주의자” 사이에 벌어진 유명한 논쟁은 기나긴 싸움의 한 일화일 뿐이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19세기의 자의식적이고 지성화된 그 논쟁은 러시아 문화의 방향을 결정하려고 시도했던 다른 서방화 세력, 즉 이탈리아에서 온 라틴화론자, 독일에서 온 경건주의자, 프랑스에서 온 “볼테르주의자”, 영국에서 온 철도 건설자를 고려함으로써 역사적 전망 속에 놓일 것이다. 서방이라는 효모를 러시아 안에 집어넣었던 러시아의 중심지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그 중심지란 실제의, 그리고 기억 속의 노브고로드와 당당한 메트로폴리스 성 페테르부르그-레닌그라드이다. 이 저작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역점 가운데에는 소련 이념가들의 공식 해석이나 서방의 지적인 역사가 대다수의 비공식적 합의에 현재 반영된 일반적 이미지와 맞지 않는 것이 많다. 내 해석에는 일반적이지 않아서 논란이 일 수 있는 특이한 사항이 들어있다는 점을 전문가는 알아차릴 (그리고 그런 점이 비전문가에게는 경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사항으로는 “모든 시대는 영원으로부터 등거리에 있다”는, 그리고 때로는 직전의 상황보다 형성기의 영향력이 그 뒤의 사태전개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는 믿음에서 (비록 상고시대는 아닐지라도) 고대를 전반적으로 강조한다는 점,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통치기 교회분열의, 그리고 알렉산드르 1세 통치기의 반(反)계몽의 시작처럼 결정적인데 자주 무시된 몇몇 전환점을 세세하게 파고든다는 점, 종교적인 사상과 시류와 더불어 세속적인 사상과 시류에도 끊임없이 관심을 보인다는 점, 더 낯익은 1825년 이후 시대의 안에서 상대적 역점을 러시아 발전의 더 확연하게 서방적인 양상, 즉 “근대화” 양상보다는 러시아 특유의 양상에 둔다는 점 등이 있다. 이 주제들에 관해 쓰인 더 오래된 자료의 부피와 소비에트 연방의 안과 밖에서 러시아 문화에 깊이 빠져든 많은 이 사이에서 지속되는 그 주제들에 관한 관심의 깊이에 힘을 얻어 나는 이 연구의 특별한 강조점에는 러시아에 관한 객관적 사실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으며 단지 역사가 한 개인의 주관적 호기심만 반영되어 있지는 않다고 믿게 되었다. 본문은 대체로 1차 사료와 상세한 러시아어 연구단행본을 - 특히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인문학이 활짝 꽃을 피운 마지막 기간에 간행된 자료를 - 새롭게 읽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서방과 최근 소련의 학술서도 꽤 많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다른 역사 개설서들은 비교적 별로 이용되지 않았고, 분량은 상당하지만 중언부언하고 전거가 의심스러운 일단의 대중적인 러시아 관련 서방 문헌은 거의 전혀 이용되지 않았다. 본문은 폭넓은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쓰였으며, 바람이기는 하지만 러시아사 사전지식이 없는 이들에게도 아주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 책 끝에 있는 후주의 용도는 중요한 인용의 원어 원전과 주요 유럽어로 된 입수 가능한 - 특히 논쟁거리가 되거나 낯설거나 다른 데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주제에 관한 - 자료의 간략한 서적해제 안내를 더 전문적인 연구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나의 해석과 강조점이 완벽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거나 권위의 아우라를 부여하려는 의도로 기다란 자료 목록을 붙여놓지는 않았다. 이용되거나 언급되지 않은 훌륭한 저작이 많으며, 논의되지 않은 중요한 주제가 많다. 나는 이 저작을 체계적 분석이나 철저한 규명으로서가 아니라 안정적이지 않지만 창의적인 한 민족을 내적으로 이해하려는 끊임없는 공동 탐구에서 일어난 일화로서 학자와 일반 독자에게 내놓고자 한다. 목적은 임상시험처럼 들리는 “감정이입”이라기보다는 독일인이 아인퓔룽(Einfuhlung)이라고 부르는 것, 즉 “안에서 느끼기”, 그리고 러시아인 스스로는 잉크가 빨종이에, 또는 열이 쇠에 스며든다는 의미로 - 침투나 침윤을 뜻하는 - 프로니크노베니예(проникновение)라고 부르는 것이다. 연루되어 있다는 이런 감정만이 외부의 관찰자가 일관성 없는 인상을 넘어서서 불가피한 일반화에서 헤어나 업신여기기와 치켜세우기, 공포와 이상화, 칭기즈 한과 프레스터 요한 사이를 이리저리 어지럽게 왔다갔다 하지 않도록 막아줄 수 있다. 이런 더 깊은 이해의 추구는 내면을 성찰하는 러시아인 스스로의 논의를 오랫동안 불러일으켜 왔다. 아마도 20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일 알렉산드르 블록은 러시아를 스핑크스에 비긴 적이 있다.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경험은 러시아 역사의 더 앞 시기의 미해결 논쟁에 새로운 논란을 보탰다. 이런 이해의 추구는 바깥 세계에서도 이루어진다. 바깥 세계는 근대 러시아 문화의 두 주요 사건으로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그 두 사건이란 19세기에 일어난 문학의 폭발과 20세기에 일어난 정치 격변이다. 역사가는 과거를 연구하면 어떻게든 사람들이 현재를 깊이 이해할지 - 심지어 어쩌면 미래의 가능태에 관한 단서의 파편이라도 얻을지 - 모른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그 자체를 위해 말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이다. 더 앞 시대의 이 문화가 오늘날 도시화된 공산주의 제국과 연관성이 별로 없다고 느끼는 이들마저도 여전히 러시아 문화에 도스토옙스키가 자기가 느끼기에 죽은 문화인 서방 문화에 다가선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다가설지 모른다. 나는 내가 가는 곳이 그저 묘지라는 걸 알아, 하지만 가장, 가장 소중한 묘지야! …… 거기에는 소중한 망자들이 누워 있으며, 그들 위에 놓인 비석 하나하나가 다 내가 …… 땅에 엎어져 이 비석에 입을 맞추고 그 위에서 울어버릴 만큼 지난 치열한 삶을, 그리고 그 삶의 위업, 그 삶의 진실, 그 삶의 투쟁, 그 삶의 지식에 관한 열렬한 믿음을 알려주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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