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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 수전 손택, 시그리드 누네즈, 버지니아 울프, 조앤 디디온...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번역가 홍한별은 20여 년 동안 100여 권 넘는 책을 번역해온 베테랑이다. 베테랑 직업인을 생각할 때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다. 치열한 고뇌를 들키지 않는 자연스러움이나 매끄러움 같은 것이랄까, 오랜 세월 담금질 당한 사람 특유의 달관 같은 것. 그가 번역에 관한 에세이를 썼다고 했을 때, 그의 글에서도 그런 묵묵한 매끄러움이 담겨 있으려니 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마주한 것은 의외로 그가 긴 세월 해온 작업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좀체 손에 잡히지 않는 번역이라는 대상에 대하여. 그가 아름답게 토해내는 번역의 모호함에 대해 읽으며 그간 번역이라는 일이 어떤 막막함을 품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음을 깨달았다.
해보지 않은 이들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이 막막함을 설명하기 위해 홍한별은 <모비딕>에서의 흰 고래 묘사를 은유로 활용한다. 나의 언어로 닿을 수 없는 원본에 대한 설명, 덧칠로 완성 불가능한 흰색... 그리고 그는 바벨탑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베니스의 상인> 등 수많은 텍스트들 사이를 건너가며 번역을 설명하고 비유하고 해부한다. 오랜 시간 동안 언어와 사투하며 마주한 벽들에 관해 쌓아온 생각들이 푹 익은 채 이어진다. 실재와 언어와 문장과 책의 우주, 그 깊은 어딘가에서 고뇌하고 좌절하며 무언가를 살려내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떻게 지금까지 번역가의 세계가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던가 의아해진다. 그간 읽어온 책들, 저자 이름 옆에 박혀있던 이름들을 왠지 아련한 마음으로 하나하나 떠올려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