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헤더배너
상품평점 help

분류국내저자 > 소설

이름:김주영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39년, 대한민국 경상북도 청송

직업:소설가

기타: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데뷔작
1970년 여름사냥

최근작
2021년 5월 <광덕산 딱새 죽이기>

이 저자의 마니아
마니아 이미지
후애(厚...
1번째
마니아
마니아 이미지
VANI...
2번째
마니아
마니아 이미지
순오기
3번째
마니아

12

객주 1

한 인생에 있어 가치 있는 연령대라고 할 수 있는 40대 초반의 근 5년 동안을 이 소설에 매달려 있었으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던 것은 어린 시절 나를 매혹시켰던 저잣거리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지워 버릴 수 없었던 것과 함께 작가적 호기심과 충동이 끊임없이 나를 충동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전체적 흐름을 구성하고 있는 저잣거리. 그 저잣거리에서 나는 감수성 많은 소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내가 살던 시골의 읍내 마을에서는 5일마다 한 번씩 저자가 열렸다. 내가 살던 집의 울타리 밖이 장터였고 울타리 안쪽은 우리 집 마당이었다. 그러나 그 울타리는 어느새 극성스러운 장돌림들에 의해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 집 마당에서 유기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드팀전을 벌이는가 하면 어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땀 냄새가 푹푹 배어 나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을 보아 왔다. 때로는 엄지머리 한 노인네가 숫돌 지게를 우리 집 앞마당에 내려놓고 들메끈을 고치면서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보면 그 북새판을 이루던 장꾼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저잣거리엔 허섭스레기만 굴러가고 낟곡식을 쪼는 참새 떼들만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적막감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명색 작가가 되면서 나는 그 강렬했던 인생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배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백적인 강박감에 부대껴 왔다. <<객주>>는 그런 강박감에 대한 하나의 해결이었다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이 쓰인 두 번째 이유는, 기왕에 썼던 이른바 역사 소설에 대한 나름대로의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 기술은 정치사 일변도에 또한 너무나 직설적이란 데 반성의 여지를 갖고 있고 역사 소설 역시 그런 기술 방식의 범주에서 과감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이 없지 않았다. 왕권의 계승이나 쟁탈, 혹은 그것에 따른 궁중 비화나 권문세가들의 권력 다툼이나 혹은 그들에 대한 인간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반면 백성들의 이야기는 뒤꼍에 비치는 햇살처럼 잠깐 비치고 말거나 야담(野談)으로 봉놋방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백성들 쪽에서 바라보는 역사 인식에 대한 배타성이 우리 역사 기술에는 너무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되었다. 5년이란 기간 동안에 쓴 긴 소설 속에서 그리고 그 수많은 인물 중에서 단 한 사람의 영웅도 만들지 않았던 까닭은 나름대로의 시각 때문이기도 하였다. 세 번째는 오늘에 쓰이고 있는 소설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우리말 서술의 화석화(化石化) 현상에 대한 염려도 이 소설에는 포함되어 있다. 이 소설에 기술되는 문장이 지적이거나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어휘, 그리고 마모되거나 퇴화돼 버린 언어들을 굳이 골라 가창적 서정성을 꾀하려 했던 연유가 거기에 있고 사고적인 것보다 미각적인 어휘를 굳이 찾아 쓰게 된 것도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 감정에 보다 밀착되어서 서민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것에 연유한다. 상투적인 개념에서 따지고 든다면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이것은 한 사람의 영웅도 만들지 않았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면서도 그 많은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나름대로 고유한 삶의 모습을 색출해서 악센트를 주려고 노력했었다. 어쨌든 한 사람의 이름을 내걸고 쓰인 소설에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겠다. 그 준엄한 문학적 현실이 5년 동안이나 이 소설 하나에 매달려 온 나를 허탈과 감상적인 공복감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제 이 소설에 대해선 항변이든 변명이든 쓸 수 있는 말은 단 한 장의 원고지가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단 한 개의 어휘를 찾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면서 내가 부수적으로 얻은 것은 하루에 한 갑 피우던 담배가 두 갑 반으로 불어났다는 것이다. 이제 아홉 권으로 이 소설을 마감함에 있어 많은 번역서들과 경제 관계 저술들의 도움이 없었던들 이 소설이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1981년 3월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업상의 출혈을 무릅쓰면서까지 웃는 얼굴로 묵묵하게 연속적으로 책을 꾸며 주었던 창작과 비평사 여러분들과 특히 이 소설이 한 권 한 권씩 발간될 때마다 낱말 고르기와 시대 고증에 폭넓은 조언을 해주신 정해렴(丁海濂) 선생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1981년 3월 - 작가의 말

객주 1

이 소설의 초판본이 출간된 것이 1981년 3월이었으니, 그 후 22년이란 수월찮은 세월이 흘러간 셈이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이 소설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상업적 성취와 상관없이 절판시키지 않고 계속 발간해준 창작과비평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개정판에선 그동안 각 부의 말미에 따로 모아두었던 낱말 풀이를 각 페이지 아래 각주로 옮겨서 읽기 손쉽게 만든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낯선 한자어나 낱말들을 요즈음의 언어 감각에 걸맞도록 풀어 쓴 대목도 없지 않다. 개정판 작업에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이 소설을 꼼꼼하게 점검하며 읽는 기회를 가졌다.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토로한다면, 예순을 훌쩍 넘긴 지금의 나이에 이처럼 방대하고 어려운 소설을 쓰라는 부추김이나 주문이 있다면, 십중팔구 손사래 치며 먼발치로 달아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쓴 40대 초반에 가졌던 남다른 근력과 열정, 그리고 인내심과 불고염치, 혹은 치열성이 이젠 남의 일처럼 부러움으로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소설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줄 것은, 또다시 살펴보아도 이 소설 안에 뚜렷하게 부각시킨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의 행간에서 속절없이 배설되고 말았거나 혹은 잊혀져 버린 조선 시대 떠돌이 서민들의 행로를 추적한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침묵이나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고, 어엿한 성명을 붙여 주고, 역할을 부여한 작업으로서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이 소설에 진술되어 있는 문장이 지적이거나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것, 그리고 가창적(歌唱的) 서정성을 지니게 된 까닭도 그 시대 서민들의 밑바닥 삶을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밟고 또 밟아도 또다시 일어서는 것을 멈추지 않는 질경이 같은 인생들이 가지는 독특한 향기, 그리고 언제나 소매 끝에 바람 소리가 끊이지 않는 떠돌이 인생들이 가지는 몸부림과 서정을 진술하려는데 아홉 권이나 되는 소설로 묶게 되었다는 것은 과문의 탓으로 돌리고 싶다. 출판사를 옮겨 개정판을 내는 일에까지 따뜻하고 너그러운 조언과 배려를 아끼지 않은 창작과 비평사, 그리고 개정판 간행을 선뜻 받아들여 주고, 수개월 동안 어려운 작업을 감당해 준 문이당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2002년 12월 - 작가의 말

객주 1

아홉 권으로 끝맺었던 소설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되었다. 열 권째 쓰기를 착수하기 전까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다. 그 긴 세월 동안 나는, 대체로 남들이 하지 말라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 말라는 짓을 저지르며 조금 삐딱하게 살아보면, 이른바 인문학적으로 혹은 인격적인 소득을 획득하기는 어렵지만, 재미가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재미 일변도의 생활에 탐닉하면서도 가슴속 어딘가 에는 항상 쓰다 그만둔 것 같은 소설 객주에 대한 미진함이 내 덜미를 뒤틀어쥐고 있었다. 그것이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된 첫번째 이유다. 두번째는 연달아 쓰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의 소재와 자료들이 우연히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너무나 확실하게 남아 있는 내륙 지방 보부상들이 남긴 자료들과 그들이 실제로 겪었던 애환들을 소설로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객주』를 쓴 작가로선 필경 여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것이 바로 30여 년이 흘러간 지금 다시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된 연유다. 2013년 봄 - 개정판을 펴내며

객주 10

아홉 권으로 끝맺었던 소설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되었다. 열 권째 쓰기를 착수하기 전까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다. 그 긴 세월 동안 나는, 대체로 남들이 하지 말라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 말라는 짓을 저지르며 조금 삐딱하게 살아보면, 이른바 인문학적으로 혹은 인격적인 소득을 획득하기는 어렵지만, 재미가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재미 일변도의 생활에 탐닉하면서도 가슴속 어딘가 에는 항상 쓰다 그만둔 것 같은 소설 객주에 대한 미진함이 내 덜미를 뒤틀어쥐고 있었다. 그것이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된 첫번째 이유다. 두번째는 연달아 쓰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의 소재와 자료들이 우연히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너무나 확실하게 남아 있는 내륙 지방 보부상들이 남긴 자료들과 그들이 실제로 겪었던 애환들을 소설로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객주』를 쓴 작가로선 필경 여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것이 바로 30여 년이 흘러간 지금 다시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된 연유다. 2013년 봄 - 개정판을 펴내며

객주 10

이 소설의 초판본이 출간된 것이 1981년 3월이었으니, 그 후 22년이란 수월찮은 세월이 흘러간 셈이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이 소설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상업적 성취와 상관없이 절판시키지 않고 계속 발간해준 창작과비평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개정판에선 그동안 각 부의 말미에 따로 모아두었던 낱말 풀이를 각 페이지 아래 각주로 옮겨서 읽기 손쉽게 만든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낯선 한자어나 낱말들을 요즈음의 언어 감각에 걸맞도록 풀어 쓴 대목도 없지 않다. 개정판 작업에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이 소설을 꼼꼼하게 점검하며 읽는 기회를 가졌다.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토로한다면, 예순을 훌쩍 넘긴 지금의 나이에 이처럼 방대하고 어려운 소설을 쓰라는 부추김이나 주문이 있다면, 십중팔구 손사래 치며 먼발치로 달아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쓴 40대 초반에 가졌던 남다른 근력과 열정, 그리고 인내심과 불고염치, 혹은 치열성이 이젠 남의 일처럼 부러움으로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소설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줄 것은, 또다시 살펴보아도 이 소설 안에 뚜렷하게 부각시킨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의 행간에서 속절없이 배설되고 말았거나 혹은 잊혀져 버린 조선 시대 떠돌이 서민들의 행로를 추적한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침묵이나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고, 어엿한 성명을 붙여 주고, 역할을 부여한 작업으로서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이 소설에 진술되어 있는 문장이 지적이거나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것, 그리고 가창적(歌唱的) 서정성을 지니게 된 까닭도 그 시대 서민들의 밑바닥 삶을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밟고 또 밟아도 또다시 일어서는 것을 멈추지 않는 질경이 같은 인생들이 가지는 독특한 향기, 그리고 언제나 소매 끝에 바람 소리가 끊이지 않는 떠돌이 인생들이 가지는 몸부림과 서정을 진술하려는데 아홉 권이나 되는 소설로 묶게 되었다는 것은 과문의 탓으로 돌리고 싶다. 출판사를 옮겨 개정판을 내는 일에까지 따뜻하고 너그러운 조언과 배려를 아끼지 않은 창작과 비평사, 그리고 개정판 간행을 선뜻 받아들여 주고, 수개월 동안 어려운 작업을 감당해 준 문이당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2002년 12월 - 작가의 말

객주 10

한 인생에 있어 가치 있는 연령대라고 할 수 있는 40대 초반의 근 5년 동안을 이 소설에 매달려 있었으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던 것은 어린 시절 나를 매혹시켰던 저잣거리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지워 버릴 수 없었던 것과 함께 작가적 호기심과 충동이 끊임없이 나를 충동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전체적 흐름을 구성하고 있는 저잣거리. 그 저잣거리에서 나는 감수성 많은 소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내가 살던 시골의 읍내 마을에서는 5일마다 한 번씩 저자가 열렸다. 내가 살던 집의 울타리 밖이 장터였고 울타리 안쪽은 우리 집 마당이었다. 그러나 그 울타리는 어느새 극성스러운 장돌림들에 의해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 집 마당에서 유기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드팀전을 벌이는가 하면 어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땀 냄새가 푹푹 배어 나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을 보아 왔다. 때로는 엄지머리 한 노인네가 숫돌 지게를 우리 집 앞마당에 내려놓고 들메끈을 고치면서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보면 그 북새판을 이루던 장꾼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저잣거리엔 허섭스레기만 굴러가고 낟곡식을 쪼는 참새 떼들만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적막감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명색 작가가 되면서 나는 그 강렬했던 인생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배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백적인 강박감에 부대껴 왔다. <<객주>>는 그런 강박감에 대한 하나의 해결이었다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이 쓰인 두 번째 이유는, 기왕에 썼던 이른바 역사 소설에 대한 나름대로의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 기술은 정치사 일변도에 또한 너무나 직설적이란 데 반성의 여지를 갖고 있고 역사 소설 역시 그런 기술 방식의 범주에서 과감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이 없지 않았다. 왕권의 계승이나 쟁탈, 혹은 그것에 따른 궁중 비화나 권문세가들의 권력 다툼이나 혹은 그들에 대한 인간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반면 백성들의 이야기는 뒤꼍에 비치는 햇살처럼 잠깐 비치고 말거나 야담(野談)으로 봉놋방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백성들 쪽에서 바라보는 역사 인식에 대한 배타성이 우리 역사 기술에는 너무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되었다. 5년이란 기간 동안에 쓴 긴 소설 속에서 그리고 그 수많은 인물 중에서 단 한 사람의 영웅도 만들지 않았던 까닭은 나름대로의 시각 때문이기도 하였다. 세 번째는 오늘에 쓰이고 있는 소설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우리말 서술의 화석화(化石化) 현상에 대한 염려도 이 소설에는 포함되어 있다. 이 소설에 기술되는 문장이 지적이거나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어휘, 그리고 마모되거나 퇴화돼 버린 언어들을 굳이 골라 가창적 서정성을 꾀하려 했던 연유가 거기에 있고 사고적인 것보다 미각적인 어휘를 굳이 찾아 쓰게 된 것도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 감정에 보다 밀착되어서 서민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것에 연유한다. 상투적인 개념에서 따지고 든다면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이것은 한 사람의 영웅도 만들지 않았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면서도 그 많은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나름대로 고유한 삶의 모습을 색출해서 악센트를 주려고 노력했었다. 어쨌든 한 사람의 이름을 내걸고 쓰인 소설에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겠다. 그 준엄한 문학적 현실이 5년 동안이나 이 소설 하나에 매달려 온 나를 허탈과 감상적인 공복감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제 이 소설에 대해선 항변이든 변명이든 쓸 수 있는 말은 단 한 장의 원고지가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단 한 개의 어휘를 찾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면서 내가 부수적으로 얻은 것은 하루에 한 갑 피우던 담배가 두 갑 반으로 불어났다는 것이다. 이제 아홉 권으로 이 소설을 마감함에 있어 많은 번역서들과 경제 관계 저술들의 도움이 없었던들 이 소설이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1981년 3월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업상의 출혈을 무릅쓰면서까지 웃는 얼굴로 묵묵하게 연속적으로 책을 꾸며 주었던 창작과 비평사 여러분들과 특히 이 소설이 한 권 한 권씩 발간될 때마다 낱말 고르기와 시대 고증에 폭넓은 조언을 해주신 정해렴(丁海濂) 선생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1981년 3월 - 작가의 말

객주 2

한 인생에 있어 가치 있는 연령대라고 할 수 있는 40대 초반의 근 5년 동안을 이 소설에 매달려 있었으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던 것은 어린 시절 나를 매혹시켰던 저잣거리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지워 버릴 수 없었던 것과 함께 작가적 호기심과 충동이 끊임없이 나를 충동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전체적 흐름을 구성하고 있는 저잣거리. 그 저잣거리에서 나는 감수성 많은 소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내가 살던 시골의 읍내 마을에서는 5일마다 한 번씩 저자가 열렸다. 내가 살던 집의 울타리 밖이 장터였고 울타리 안쪽은 우리 집 마당이었다. 그러나 그 울타리는 어느새 극성스러운 장돌림들에 의해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 집 마당에서 유기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드팀전을 벌이는가 하면 어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땀 냄새가 푹푹 배어 나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을 보아 왔다. 때로는 엄지머리 한 노인네가 숫돌 지게를 우리 집 앞마당에 내려놓고 들메끈을 고치면서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보면 그 북새판을 이루던 장꾼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저잣거리엔 허섭스레기만 굴러가고 낟곡식을 쪼는 참새 떼들만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적막감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명색 작가가 되면서 나는 그 강렬했던 인생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배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백적인 강박감에 부대껴 왔다. <<객주>>는 그런 강박감에 대한 하나의 해결이었다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이 쓰인 두 번째 이유는, 기왕에 썼던 이른바 역사 소설에 대한 나름대로의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 기술은 정치사 일변도에 또한 너무나 직설적이란 데 반성의 여지를 갖고 있고 역사 소설 역시 그런 기술 방식의 범주에서 과감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이 없지 않았다. 왕권의 계승이나 쟁탈, 혹은 그것에 따른 궁중 비화나 권문세가들의 권력 다툼이나 혹은 그들에 대한 인간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반면 백성들의 이야기는 뒤꼍에 비치는 햇살처럼 잠깐 비치고 말거나 야담(野談)으로 봉놋방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백성들 쪽에서 바라보는 역사 인식에 대한 배타성이 우리 역사 기술에는 너무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되었다. 5년이란 기간 동안에 쓴 긴 소설 속에서 그리고 그 수많은 인물 중에서 단 한 사람의 영웅도 만들지 않았던 까닭은 나름대로의 시각 때문이기도 하였다. 세 번째는 오늘에 쓰이고 있는 소설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우리말 서술의 화석화(化石化) 현상에 대한 염려도 이 소설에는 포함되어 있다. 이 소설에 기술되는 문장이 지적이거나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어휘, 그리고 마모되거나 퇴화돼 버린 언어들을 굳이 골라 가창적 서정성을 꾀하려 했던 연유가 거기에 있고 사고적인 것보다 미각적인 어휘를 굳이 찾아 쓰게 된 것도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 감정에 보다 밀착되어서 서민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것에 연유한다. 상투적인 개념에서 따지고 든다면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이것은 한 사람의 영웅도 만들지 않았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면서도 그 많은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나름대로 고유한 삶의 모습을 색출해서 악센트를 주려고 노력했었다. 어쨌든 한 사람의 이름을 내걸고 쓰인 소설에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겠다. 그 준엄한 문학적 현실이 5년 동안이나 이 소설 하나에 매달려 온 나를 허탈과 감상적인 공복감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제 이 소설에 대해선 항변이든 변명이든 쓸 수 있는 말은 단 한 장의 원고지가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단 한 개의 어휘를 찾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면서 내가 부수적으로 얻은 것은 하루에 한 갑 피우던 담배가 두 갑 반으로 불어났다는 것이다. 이제 아홉 권으로 이 소설을 마감함에 있어 많은 번역서들과 경제 관계 저술들의 도움이 없었던들 이 소설이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1981년 3월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업상의 출혈을 무릅쓰면서까지 웃는 얼굴로 묵묵하게 연속적으로 책을 꾸며 주었던 창작과 비평사 여러분들과 특히 이 소설이 한 권 한 권씩 발간될 때마다 낱말 고르기와 시대 고증에 폭넓은 조언을 해주신 정해렴(丁海濂) 선생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1981년 3월 - 작가의 말

객주 2

이 소설의 초판본이 출간된 것이 1981년 3월이었으니, 그 후 22년이란 수월찮은 세월이 흘러간 셈이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이 소설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상업적 성취와 상관없이 절판시키지 않고 계속 발간해준 창작과비평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개정판에선 그동안 각 부의 말미에 따로 모아두었던 낱말 풀이를 각 페이지 아래 각주로 옮겨서 읽기 손쉽게 만든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낯선 한자어나 낱말들을 요즈음의 언어 감각에 걸맞도록 풀어 쓴 대목도 없지 않다. 개정판 작업에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이 소설을 꼼꼼하게 점검하며 읽는 기회를 가졌다.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토로한다면, 예순을 훌쩍 넘긴 지금의 나이에 이처럼 방대하고 어려운 소설을 쓰라는 부추김이나 주문이 있다면, 십중팔구 손사래 치며 먼발치로 달아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쓴 40대 초반에 가졌던 남다른 근력과 열정, 그리고 인내심과 불고염치, 혹은 치열성이 이젠 남의 일처럼 부러움으로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소설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줄 것은, 또다시 살펴보아도 이 소설 안에 뚜렷하게 부각시킨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의 행간에서 속절없이 배설되고 말았거나 혹은 잊혀져 버린 조선 시대 떠돌이 서민들의 행로를 추적한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침묵이나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고, 어엿한 성명을 붙여 주고, 역할을 부여한 작업으로서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이 소설에 진술되어 있는 문장이 지적이거나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것, 그리고 가창적(歌唱的) 서정성을 지니게 된 까닭도 그 시대 서민들의 밑바닥 삶을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밟고 또 밟아도 또다시 일어서는 것을 멈추지 않는 질경이 같은 인생들이 가지는 독특한 향기, 그리고 언제나 소매 끝에 바람 소리가 끊이지 않는 떠돌이 인생들이 가지는 몸부림과 서정을 진술하려는데 아홉 권이나 되는 소설로 묶게 되었다는 것은 과문의 탓으로 돌리고 싶다. 출판사를 옮겨 개정판을 내는 일에까지 따뜻하고 너그러운 조언과 배려를 아끼지 않은 창작과 비평사, 그리고 개정판 간행을 선뜻 받아들여 주고, 수개월 동안 어려운 작업을 감당해 준 문이당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2002년 12월 - 작가의 말

객주 2

아홉 권으로 끝맺었던 소설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되었다. 열 권째 쓰기를 착수하기 전까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다. 그 긴 세월 동안 나는, 대체로 남들이 하지 말라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 말라는 짓을 저지르며 조금 삐딱하게 살아보면, 이른바 인문학적으로 혹은 인격적인 소득을 획득하기는 어렵지만, 재미가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재미 일변도의 생활에 탐닉하면서도 가슴속 어딘가 에는 항상 쓰다 그만둔 것 같은 소설 객주에 대한 미진함이 내 덜미를 뒤틀어쥐고 있었다. 그것이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된 첫번째 이유다. 두번째는 연달아 쓰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의 소재와 자료들이 우연히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너무나 확실하게 남아 있는 내륙 지방 보부상들이 남긴 자료들과 그들이 실제로 겪었던 애환들을 소설로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객주』를 쓴 작가로선 필경 여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것이 바로 30여 년이 흘러간 지금 다시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된 연유다. 2013년 봄 - 개정판을 펴내며

객주 3

아홉 권으로 끝맺었던 소설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되었다. 열 권째 쓰기를 착수하기 전까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다. 그 긴 세월 동안 나는, 대체로 남들이 하지 말라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 말라는 짓을 저지르며 조금 삐딱하게 살아보면, 이른바 인문학적으로 혹은 인격적인 소득을 획득하기는 어렵지만, 재미가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재미 일변도의 생활에 탐닉하면서도 가슴속 어딘가 에는 항상 쓰다 그만둔 것 같은 소설 객주에 대한 미진함이 내 덜미를 뒤틀어쥐고 있었다. 그것이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된 첫번째 이유다. 두번째는 연달아 쓰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의 소재와 자료들이 우연히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너무나 확실하게 남아 있는 내륙 지방 보부상들이 남긴 자료들과 그들이 실제로 겪었던 애환들을 소설로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객주』를 쓴 작가로선 필경 여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것이 바로 30여 년이 흘러간 지금 다시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된 연유다. 2013년 봄 - 개정판을 펴내며

객주 3

이 소설의 초판본이 출간된 것이 1981년 3월이었으니, 그 후 22년이란 수월찮은 세월이 흘러간 셈이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이 소설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상업적 성취와 상관없이 절판시키지 않고 계속 발간해준 창작과비평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개정판에선 그동안 각 부의 말미에 따로 모아두었던 낱말 풀이를 각 페이지 아래 각주로 옮겨서 읽기 손쉽게 만든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낯선 한자어나 낱말들을 요즈음의 언어 감각에 걸맞도록 풀어 쓴 대목도 없지 않다. 개정판 작업에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이 소설을 꼼꼼하게 점검하며 읽는 기회를 가졌다.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토로한다면, 예순을 훌쩍 넘긴 지금의 나이에 이처럼 방대하고 어려운 소설을 쓰라는 부추김이나 주문이 있다면, 십중팔구 손사래 치며 먼발치로 달아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쓴 40대 초반에 가졌던 남다른 근력과 열정, 그리고 인내심과 불고염치, 혹은 치열성이 이젠 남의 일처럼 부러움으로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소설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줄 것은, 또다시 살펴보아도 이 소설 안에 뚜렷하게 부각시킨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의 행간에서 속절없이 배설되고 말았거나 혹은 잊혀져 버린 조선 시대 떠돌이 서민들의 행로를 추적한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침묵이나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고, 어엿한 성명을 붙여 주고, 역할을 부여한 작업으로서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이 소설에 진술되어 있는 문장이 지적이거나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것, 그리고 가창적(歌唱的) 서정성을 지니게 된 까닭도 그 시대 서민들의 밑바닥 삶을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밟고 또 밟아도 또다시 일어서는 것을 멈추지 않는 질경이 같은 인생들이 가지는 독특한 향기, 그리고 언제나 소매 끝에 바람 소리가 끊이지 않는 떠돌이 인생들이 가지는 몸부림과 서정을 진술하려는데 아홉 권이나 되는 소설로 묶게 되었다는 것은 과문의 탓으로 돌리고 싶다. 출판사를 옮겨 개정판을 내는 일에까지 따뜻하고 너그러운 조언과 배려를 아끼지 않은 창작과 비평사, 그리고 개정판 간행을 선뜻 받아들여 주고, 수개월 동안 어려운 작업을 감당해 준 문이당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2002년 12월 - 작가의 말

객주 3

한 인생에 있어 가치 있는 연령대라고 할 수 있는 40대 초반의 근 5년 동안을 이 소설에 매달려 있었으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던 것은 어린 시절 나를 매혹시켰던 저잣거리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지워 버릴 수 없었던 것과 함께 작가적 호기심과 충동이 끊임없이 나를 충동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전체적 흐름을 구성하고 있는 저잣거리. 그 저잣거리에서 나는 감수성 많은 소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내가 살던 시골의 읍내 마을에서는 5일마다 한 번씩 저자가 열렸다. 내가 살던 집의 울타리 밖이 장터였고 울타리 안쪽은 우리 집 마당이었다. 그러나 그 울타리는 어느새 극성스러운 장돌림들에 의해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 집 마당에서 유기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드팀전을 벌이는가 하면 어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땀 냄새가 푹푹 배어 나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을 보아 왔다. 때로는 엄지머리 한 노인네가 숫돌 지게를 우리 집 앞마당에 내려놓고 들메끈을 고치면서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보면 그 북새판을 이루던 장꾼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저잣거리엔 허섭스레기만 굴러가고 낟곡식을 쪼는 참새 떼들만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적막감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명색 작가가 되면서 나는 그 강렬했던 인생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배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백적인 강박감에 부대껴 왔다. <<객주>>는 그런 강박감에 대한 하나의 해결이었다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이 쓰인 두 번째 이유는, 기왕에 썼던 이른바 역사 소설에 대한 나름대로의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 기술은 정치사 일변도에 또한 너무나 직설적이란 데 반성의 여지를 갖고 있고 역사 소설 역시 그런 기술 방식의 범주에서 과감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이 없지 않았다. 왕권의 계승이나 쟁탈, 혹은 그것에 따른 궁중 비화나 권문세가들의 권력 다툼이나 혹은 그들에 대한 인간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반면 백성들의 이야기는 뒤꼍에 비치는 햇살처럼 잠깐 비치고 말거나 야담(野談)으로 봉놋방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백성들 쪽에서 바라보는 역사 인식에 대한 배타성이 우리 역사 기술에는 너무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되었다. 5년이란 기간 동안에 쓴 긴 소설 속에서 그리고 그 수많은 인물 중에서 단 한 사람의 영웅도 만들지 않았던 까닭은 나름대로의 시각 때문이기도 하였다. 세 번째는 오늘에 쓰이고 있는 소설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우리말 서술의 화석화(化石化) 현상에 대한 염려도 이 소설에는 포함되어 있다. 이 소설에 기술되는 문장이 지적이거나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어휘, 그리고 마모되거나 퇴화돼 버린 언어들을 굳이 골라 가창적 서정성을 꾀하려 했던 연유가 거기에 있고 사고적인 것보다 미각적인 어휘를 굳이 찾아 쓰게 된 것도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 감정에 보다 밀착되어서 서민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것에 연유한다. 상투적인 개념에서 따지고 든다면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이것은 한 사람의 영웅도 만들지 않았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면서도 그 많은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나름대로 고유한 삶의 모습을 색출해서 악센트를 주려고 노력했었다. 어쨌든 한 사람의 이름을 내걸고 쓰인 소설에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겠다. 그 준엄한 문학적 현실이 5년 동안이나 이 소설 하나에 매달려 온 나를 허탈과 감상적인 공복감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제 이 소설에 대해선 항변이든 변명이든 쓸 수 있는 말은 단 한 장의 원고지가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단 한 개의 어휘를 찾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면서 내가 부수적으로 얻은 것은 하루에 한 갑 피우던 담배가 두 갑 반으로 불어났다는 것이다. 이제 아홉 권으로 이 소설을 마감함에 있어 많은 번역서들과 경제 관계 저술들의 도움이 없었던들 이 소설이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1981년 3월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업상의 출혈을 무릅쓰면서까지 웃는 얼굴로 묵묵하게 연속적으로 책을 꾸며 주었던 창작과 비평사 여러분들과 특히 이 소설이 한 권 한 권씩 발간될 때마다 낱말 고르기와 시대 고증에 폭넓은 조언을 해주신 정해렴(丁海濂) 선생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1981년 3월 - 작가의 말

객주 4

한 인생에 있어 가치 있는 연령대라고 할 수 있는 40대 초반의 근 5년 동안을 이 소설에 매달려 있었으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던 것은 어린 시절 나를 매혹시켰던 저잣거리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지워 버릴 수 없었던 것과 함께 작가적 호기심과 충동이 끊임없이 나를 충동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전체적 흐름을 구성하고 있는 저잣거리. 그 저잣거리에서 나는 감수성 많은 소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내가 살던 시골의 읍내 마을에서는 5일마다 한 번씩 저자가 열렸다. 내가 살던 집의 울타리 밖이 장터였고 울타리 안쪽은 우리 집 마당이었다. 그러나 그 울타리는 어느새 극성스러운 장돌림들에 의해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 집 마당에서 유기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드팀전을 벌이는가 하면 어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땀 냄새가 푹푹 배어 나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을 보아 왔다. 때로는 엄지머리 한 노인네가 숫돌 지게를 우리 집 앞마당에 내려놓고 들메끈을 고치면서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보면 그 북새판을 이루던 장꾼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저잣거리엔 허섭스레기만 굴러가고 낟곡식을 쪼는 참새 떼들만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적막감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명색 작가가 되면서 나는 그 강렬했던 인생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배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백적인 강박감에 부대껴 왔다. <<객주>>는 그런 강박감에 대한 하나의 해결이었다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이 쓰인 두 번째 이유는, 기왕에 썼던 이른바 역사 소설에 대한 나름대로의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 기술은 정치사 일변도에 또한 너무나 직설적이란 데 반성의 여지를 갖고 있고 역사 소설 역시 그런 기술 방식의 범주에서 과감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이 없지 않았다. 왕권의 계승이나 쟁탈, 혹은 그것에 따른 궁중 비화나 권문세가들의 권력 다툼이나 혹은 그들에 대한 인간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반면 백성들의 이야기는 뒤꼍에 비치는 햇살처럼 잠깐 비치고 말거나 야담(野談)으로 봉놋방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백성들 쪽에서 바라보는 역사 인식에 대한 배타성이 우리 역사 기술에는 너무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되었다. 5년이란 기간 동안에 쓴 긴 소설 속에서 그리고 그 수많은 인물 중에서 단 한 사람의 영웅도 만들지 않았던 까닭은 나름대로의 시각 때문이기도 하였다. 세 번째는 오늘에 쓰이고 있는 소설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우리말 서술의 화석화(化石化) 현상에 대한 염려도 이 소설에는 포함되어 있다. 이 소설에 기술되는 문장이 지적이거나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어휘, 그리고 마모되거나 퇴화돼 버린 언어들을 굳이 골라 가창적 서정성을 꾀하려 했던 연유가 거기에 있고 사고적인 것보다 미각적인 어휘를 굳이 찾아 쓰게 된 것도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 감정에 보다 밀착되어서 서민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것에 연유한다. 상투적인 개념에서 따지고 든다면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이것은 한 사람의 영웅도 만들지 않았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면서도 그 많은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나름대로 고유한 삶의 모습을 색출해서 악센트를 주려고 노력했었다. 어쨌든 한 사람의 이름을 내걸고 쓰인 소설에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겠다. 그 준엄한 문학적 현실이 5년 동안이나 이 소설 하나에 매달려 온 나를 허탈과 감상적인 공복감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제 이 소설에 대해선 항변이든 변명이든 쓸 수 있는 말은 단 한 장의 원고지가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단 한 개의 어휘를 찾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면서 내가 부수적으로 얻은 것은 하루에 한 갑 피우던 담배가 두 갑 반으로 불어났다는 것이다. 이제 아홉 권으로 이 소설을 마감함에 있어 많은 번역서들과 경제 관계 저술들의 도움이 없었던들 이 소설이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1981년 3월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업상의 출혈을 무릅쓰면서까지 웃는 얼굴로 묵묵하게 연속적으로 책을 꾸며 주었던 창작과 비평사 여러분들과 특히 이 소설이 한 권 한 권씩 발간될 때마다 낱말 고르기와 시대 고증에 폭넓은 조언을 해주신 정해렴(丁海濂) 선생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1981년 3월 - 작가의 말

객주 4

이 소설의 초판본이 출간된 것이 1981년 3월이었으니, 그 후 22년이란 수월찮은 세월이 흘러간 셈이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이 소설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상업적 성취와 상관없이 절판시키지 않고 계속 발간해준 창작과비평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개정판에선 그동안 각 부의 말미에 따로 모아두었던 낱말 풀이를 각 페이지 아래 각주로 옮겨서 읽기 손쉽게 만든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낯선 한자어나 낱말들을 요즈음의 언어 감각에 걸맞도록 풀어 쓴 대목도 없지 않다. 개정판 작업에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이 소설을 꼼꼼하게 점검하며 읽는 기회를 가졌다.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토로한다면, 예순을 훌쩍 넘긴 지금의 나이에 이처럼 방대하고 어려운 소설을 쓰라는 부추김이나 주문이 있다면, 십중팔구 손사래 치며 먼발치로 달아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쓴 40대 초반에 가졌던 남다른 근력과 열정, 그리고 인내심과 불고염치, 혹은 치열성이 이젠 남의 일처럼 부러움으로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소설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줄 것은, 또다시 살펴보아도 이 소설 안에 뚜렷하게 부각시킨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의 행간에서 속절없이 배설되고 말았거나 혹은 잊혀져 버린 조선 시대 떠돌이 서민들의 행로를 추적한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침묵이나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고, 어엿한 성명을 붙여 주고, 역할을 부여한 작업으로서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이 소설에 진술되어 있는 문장이 지적이거나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것, 그리고 가창적(歌唱的) 서정성을 지니게 된 까닭도 그 시대 서민들의 밑바닥 삶을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밟고 또 밟아도 또다시 일어서는 것을 멈추지 않는 질경이 같은 인생들이 가지는 독특한 향기, 그리고 언제나 소매 끝에 바람 소리가 끊이지 않는 떠돌이 인생들이 가지는 몸부림과 서정을 진술하려는데 아홉 권이나 되는 소설로 묶게 되었다는 것은 과문의 탓으로 돌리고 싶다. 출판사를 옮겨 개정판을 내는 일에까지 따뜻하고 너그러운 조언과 배려를 아끼지 않은 창작과 비평사, 그리고 개정판 간행을 선뜻 받아들여 주고, 수개월 동안 어려운 작업을 감당해 준 문이당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2002년 12월 - 작가의 말

객주 4

아홉 권으로 끝맺었던 소설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되었다. 열 권째 쓰기를 착수하기 전까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다. 그 긴 세월 동안 나는, 대체로 남들이 하지 말라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 말라는 짓을 저지르며 조금 삐딱하게 살아보면, 이른바 인문학적으로 혹은 인격적인 소득을 획득하기는 어렵지만, 재미가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재미 일변도의 생활에 탐닉하면서도 가슴속 어딘가 에는 항상 쓰다 그만둔 것 같은 소설 객주에 대한 미진함이 내 덜미를 뒤틀어쥐고 있었다. 그것이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된 첫번째 이유다. 두번째는 연달아 쓰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의 소재와 자료들이 우연히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너무나 확실하게 남아 있는 내륙 지방 보부상들이 남긴 자료들과 그들이 실제로 겪었던 애환들을 소설로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객주』를 쓴 작가로선 필경 여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것이 바로 30여 년이 흘러간 지금 다시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된 연유다. 2013년 봄 - 개정판을 펴내며

객주 5

아홉 권으로 끝맺었던 소설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되었다. 열 권째 쓰기를 착수하기 전까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다. 그 긴 세월 동안 나는, 대체로 남들이 하지 말라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 말라는 짓을 저지르며 조금 삐딱하게 살아보면, 이른바 인문학적으로 혹은 인격적인 소득을 획득하기는 어렵지만, 재미가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재미 일변도의 생활에 탐닉하면서도 가슴속 어딘가 에는 항상 쓰다 그만둔 것 같은 소설 객주에 대한 미진함이 내 덜미를 뒤틀어쥐고 있었다. 그것이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된 첫번째 이유다. 두번째는 연달아 쓰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의 소재와 자료들이 우연히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너무나 확실하게 남아 있는 내륙 지방 보부상들이 남긴 자료들과 그들이 실제로 겪었던 애환들을 소설로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객주』를 쓴 작가로선 필경 여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것이 바로 30여 년이 흘러간 지금 다시 객주를 연달아 쓰게 된 연유다. 2013년 봄 - 개정판을 펴내며

객주 5

이 소설의 초판본이 출간된 것이 1981년 3월이었으니, 그 후 22년이란 수월찮은 세월이 흘러간 셈이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이 소설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상업적 성취와 상관없이 절판시키지 않고 계속 발간해준 창작과비평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개정판에선 그동안 각 부의 말미에 따로 모아두었던 낱말 풀이를 각 페이지 아래 각주로 옮겨서 읽기 손쉽게 만든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낯선 한자어나 낱말들을 요즈음의 언어 감각에 걸맞도록 풀어 쓴 대목도 없지 않다. 개정판 작업에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이 소설을 꼼꼼하게 점검하며 읽는 기회를 가졌다.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토로한다면, 예순을 훌쩍 넘긴 지금의 나이에 이처럼 방대하고 어려운 소설을 쓰라는 부추김이나 주문이 있다면, 십중팔구 손사래 치며 먼발치로 달아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쓴 40대 초반에 가졌던 남다른 근력과 열정, 그리고 인내심과 불고염치, 혹은 치열성이 이젠 남의 일처럼 부러움으로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소설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줄 것은, 또다시 살펴보아도 이 소설 안에 뚜렷하게 부각시킨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의 행간에서 속절없이 배설되고 말았거나 혹은 잊혀져 버린 조선 시대 떠돌이 서민들의 행로를 추적한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침묵이나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고, 어엿한 성명을 붙여 주고, 역할을 부여한 작업으로서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이 소설에 진술되어 있는 문장이 지적이거나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것, 그리고 가창적(歌唱的) 서정성을 지니게 된 까닭도 그 시대 서민들의 밑바닥 삶을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밟고 또 밟아도 또다시 일어서는 것을 멈추지 않는 질경이 같은 인생들이 가지는 독특한 향기, 그리고 언제나 소매 끝에 바람 소리가 끊이지 않는 떠돌이 인생들이 가지는 몸부림과 서정을 진술하려는데 아홉 권이나 되는 소설로 묶게 되었다는 것은 과문의 탓으로 돌리고 싶다. 출판사를 옮겨 개정판을 내는 일에까지 따뜻하고 너그러운 조언과 배려를 아끼지 않은 창작과 비평사, 그리고 개정판 간행을 선뜻 받아들여 주고, 수개월 동안 어려운 작업을 감당해 준 문이당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2002년 12월 - 작가의 말

객주 5

한 인생에 있어 가치 있는 연령대라고 할 수 있는 40대 초반의 근 5년 동안을 이 소설에 매달려 있었으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던 것은 어린 시절 나를 매혹시켰던 저잣거리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지워 버릴 수 없었던 것과 함께 작가적 호기심과 충동이 끊임없이 나를 충동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전체적 흐름을 구성하고 있는 저잣거리. 그 저잣거리에서 나는 감수성 많은 소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내가 살던 시골의 읍내 마을에서는 5일마다 한 번씩 저자가 열렸다. 내가 살던 집의 울타리 밖이 장터였고 울타리 안쪽은 우리 집 마당이었다. 그러나 그 울타리는 어느새 극성스러운 장돌림들에 의해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 집 마당에서 유기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드팀전을 벌이는가 하면 어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땀 냄새가 푹푹 배어 나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을 보아 왔다. 때로는 엄지머리 한 노인네가 숫돌 지게를 우리 집 앞마당에 내려놓고 들메끈을 고치면서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보면 그 북새판을 이루던 장꾼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저잣거리엔 허섭스레기만 굴러가고 낟곡식을 쪼는 참새 떼들만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적막감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명색 작가가 되면서 나는 그 강렬했던 인생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배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백적인 강박감에 부대껴 왔다. <<객주>>는 그런 강박감에 대한 하나의 해결이었다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이 쓰인 두 번째 이유는, 기왕에 썼던 이른바 역사 소설에 대한 나름대로의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 기술은 정치사 일변도에 또한 너무나 직설적이란 데 반성의 여지를 갖고 있고 역사 소설 역시 그런 기술 방식의 범주에서 과감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이 없지 않았다. 왕권의 계승이나 쟁탈, 혹은 그것에 따른 궁중 비화나 권문세가들의 권력 다툼이나 혹은 그들에 대한 인간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반면 백성들의 이야기는 뒤꼍에 비치는 햇살처럼 잠깐 비치고 말거나 야담(野談)으로 봉놋방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백성들 쪽에서 바라보는 역사 인식에 대한 배타성이 우리 역사 기술에는 너무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되었다. 5년이란 기간 동안에 쓴 긴 소설 속에서 그리고 그 수많은 인물 중에서 단 한 사람의 영웅도 만들지 않았던 까닭은 나름대로의 시각 때문이기도 하였다. 세 번째는 오늘에 쓰이고 있는 소설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우리말 서술의 화석화(化石化) 현상에 대한 염려도 이 소설에는 포함되어 있다. 이 소설에 기술되는 문장이 지적이거나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어휘, 그리고 마모되거나 퇴화돼 버린 언어들을 굳이 골라 가창적 서정성을 꾀하려 했던 연유가 거기에 있고 사고적인 것보다 미각적인 어휘를 굳이 찾아 쓰게 된 것도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 감정에 보다 밀착되어서 서민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것에 연유한다. 상투적인 개념에서 따지고 든다면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이것은 한 사람의 영웅도 만들지 않았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면서도 그 많은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나름대로 고유한 삶의 모습을 색출해서 악센트를 주려고 노력했었다. 어쨌든 한 사람의 이름을 내걸고 쓰인 소설에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겠다. 그 준엄한 문학적 현실이 5년 동안이나 이 소설 하나에 매달려 온 나를 허탈과 감상적인 공복감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제 이 소설에 대해선 항변이든 변명이든 쓸 수 있는 말은 단 한 장의 원고지가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단 한 개의 어휘를 찾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면서 내가 부수적으로 얻은 것은 하루에 한 갑 피우던 담배가 두 갑 반으로 불어났다는 것이다. 이제 아홉 권으로 이 소설을 마감함에 있어 많은 번역서들과 경제 관계 저술들의 도움이 없었던들 이 소설이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1981년 3월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업상의 출혈을 무릅쓰면서까지 웃는 얼굴로 묵묵하게 연속적으로 책을 꾸며 주었던 창작과 비평사 여러분들과 특히 이 소설이 한 권 한 권씩 발간될 때마다 낱말 고르기와 시대 고증에 폭넓은 조언을 해주신 정해렴(丁海濂) 선생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1981년 3월 - 작가의 말

객주 6

한 인생에 있어 가치 있는 연령대라고 할 수 있는 40대 초반의 근 5년 동안을 이 소설에 매달려 있었으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던 것은 어린 시절 나를 매혹시켰던 저잣거리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지워 버릴 수 없었던 것과 함께 작가적 호기심과 충동이 끊임없이 나를 충동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전체적 흐름을 구성하고 있는 저잣거리. 그 저잣거리에서 나는 감수성 많은 소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내가 살던 시골의 읍내 마을에서는 5일마다 한 번씩 저자가 열렸다. 내가 살던 집의 울타리 밖이 장터였고 울타리 안쪽은 우리 집 마당이었다. 그러나 그 울타리는 어느새 극성스러운 장돌림들에 의해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 집 마당에서 유기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드팀전을 벌이는가 하면 어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땀 냄새가 푹푹 배어 나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을 보아 왔다. 때로는 엄지머리 한 노인네가 숫돌 지게를 우리 집 앞마당에 내려놓고 들메끈을 고치면서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보면 그 북새판을 이루던 장꾼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저잣거리엔 허섭스레기만 굴러가고 낟곡식을 쪼는 참새 떼들만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적막감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명색 작가가 되면서 나는 그 강렬했던 인생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배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백적인 강박감에 부대껴 왔다. <<객주>>는 그런 강박감에 대한 하나의 해결이었다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이 쓰인 두 번째 이유는, 기왕에 썼던 이른바 역사 소설에 대한 나름대로의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 기술은 정치사 일변도에 또한 너무나 직설적이란 데 반성의 여지를 갖고 있고 역사 소설 역시 그런 기술 방식의 범주에서 과감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이 없지 않았다. 왕권의 계승이나 쟁탈, 혹은 그것에 따른 궁중 비화나 권문세가들의 권력 다툼이나 혹은 그들에 대한 인간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반면 백성들의 이야기는 뒤꼍에 비치는 햇살처럼 잠깐 비치고 말거나 야담(野談)으로 봉놋방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백성들 쪽에서 바라보는 역사 인식에 대한 배타성이 우리 역사 기술에는 너무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되었다. 5년이란 기간 동안에 쓴 긴 소설 속에서 그리고 그 수많은 인물 중에서 단 한 사람의 영웅도 만들지 않았던 까닭은 나름대로의 시각 때문이기도 하였다. 세 번째는 오늘에 쓰이고 있는 소설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우리말 서술의 화석화(化石化) 현상에 대한 염려도 이 소설에는 포함되어 있다. 이 소설에 기술되는 문장이 지적이거나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어휘, 그리고 마모되거나 퇴화돼 버린 언어들을 굳이 골라 가창적 서정성을 꾀하려 했던 연유가 거기에 있고 사고적인 것보다 미각적인 어휘를 굳이 찾아 쓰게 된 것도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 감정에 보다 밀착되어서 서민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것에 연유한다. 상투적인 개념에서 따지고 든다면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이것은 한 사람의 영웅도 만들지 않았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면서도 그 많은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나름대로 고유한 삶의 모습을 색출해서 악센트를 주려고 노력했었다. 어쨌든 한 사람의 이름을 내걸고 쓰인 소설에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겠다. 그 준엄한 문학적 현실이 5년 동안이나 이 소설 하나에 매달려 온 나를 허탈과 감상적인 공복감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제 이 소설에 대해선 항변이든 변명이든 쓸 수 있는 말은 단 한 장의 원고지가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단 한 개의 어휘를 찾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면서 내가 부수적으로 얻은 것은 하루에 한 갑 피우던 담배가 두 갑 반으로 불어났다는 것이다. 이제 아홉 권으로 이 소설을 마감함에 있어 많은 번역서들과 경제 관계 저술들의 도움이 없었던들 이 소설이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1981년 3월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업상의 출혈을 무릅쓰면서까지 웃는 얼굴로 묵묵하게 연속적으로 책을 꾸며 주었던 창작과 비평사 여러분들과 특히 이 소설이 한 권 한 권씩 발간될 때마다 낱말 고르기와 시대 고증에 폭넓은 조언을 해주신 정해렴(丁海濂) 선생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1981년 3월 - 작가의 말

객주 6

이 소설의 초판본이 출간된 것이 1981년 3월이었으니, 그 후 22년이란 수월찮은 세월이 흘러간 셈이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이 소설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상업적 성취와 상관없이 절판시키지 않고 계속 발간해준 창작과비평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개정판에선 그동안 각 부의 말미에 따로 모아두었던 낱말 풀이를 각 페이지 아래 각주로 옮겨서 읽기 손쉽게 만든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낯선 한자어나 낱말들을 요즈음의 언어 감각에 걸맞도록 풀어 쓴 대목도 없지 않다. 개정판 작업에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이 소설을 꼼꼼하게 점검하며 읽는 기회를 가졌다.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토로한다면, 예순을 훌쩍 넘긴 지금의 나이에 이처럼 방대하고 어려운 소설을 쓰라는 부추김이나 주문이 있다면, 십중팔구 손사래 치며 먼발치로 달아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쓴 40대 초반에 가졌던 남다른 근력과 열정, 그리고 인내심과 불고염치, 혹은 치열성이 이젠 남의 일처럼 부러움으로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소설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줄 것은, 또다시 살펴보아도 이 소설 안에 뚜렷하게 부각시킨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의 행간에서 속절없이 배설되고 말았거나 혹은 잊혀져 버린 조선 시대 떠돌이 서민들의 행로를 추적한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침묵이나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고, 어엿한 성명을 붙여 주고, 역할을 부여한 작업으로서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이 소설에 진술되어 있는 문장이 지적이거나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것, 그리고 가창적(歌唱的) 서정성을 지니게 된 까닭도 그 시대 서민들의 밑바닥 삶을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밟고 또 밟아도 또다시 일어서는 것을 멈추지 않는 질경이 같은 인생들이 가지는 독특한 향기, 그리고 언제나 소매 끝에 바람 소리가 끊이지 않는 떠돌이 인생들이 가지는 몸부림과 서정을 진술하려는데 아홉 권이나 되는 소설로 묶게 되었다는 것은 과문의 탓으로 돌리고 싶다. 출판사를 옮겨 개정판을 내는 일에까지 따뜻하고 너그러운 조언과 배려를 아끼지 않은 창작과 비평사, 그리고 개정판 간행을 선뜻 받아들여 주고, 수개월 동안 어려운 작업을 감당해 준 문이당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2002년 12월 - 작가의 말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국내문학상수상자
국내어린이문학상수상자
해외문학상수상자
해외어린이문학상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