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회사의 최고경영자가 주주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재탄생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 책으로 세간의 이목을 끈다는 것은 일견 쉬운 일 같지만, 그것은 그간 버크셔 해서웨이의 워런 버핏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에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를 제치고 2년 연속 세계 최고의 부호가 된 제프 베조스가 도전장을 내민다. 베조스는 아마존 창업 이래 매년, 주주 서한을 통해 회사 경영의 이모저모를 알려 왔다. 그런데 사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편지를 굳이 책으로 봐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할 터. 이에 오랜 기간 아마존의 경영 전략을 치밀하게 연구해 온 저자는 그 편지들에 담긴 함의를 집중 해부하여 아마존 경영의 본질을 '14가지 성장원칙'으로 제시한다.
베조스의 편지들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보고 패턴을 발견하여 다른 기업들이 참고할 만한 원칙들로 정리한 점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인다. 놀라운 건 그 중 대부분의 원칙들이 아마존 상장 첫 해인 1997년의 주주 서한에 녹아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첫 번째 편지는 베조스의 생각과 행보를 알려주는 일종의 나침반으로서, 베조스는 이를 매년 언급해 왔다. 책 말미에 전문이 수록된 2018년의 주주 서한을 보면 그는 '언제나 첫날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겠다'며 1997년의 주주 서한을 첨부함으로써 편지를 갈무리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데이원(Day 1) 정신'이다. 책을 읽고 있자니 마음은 이미 아마존의 주주가 된 기분이다. 1,800달러에 달하는 아마존 주식을 당장 살 순 없겠지만 말이다.
2019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소설가 이주란의 두번째 소설집. 마치 연작처럼 보이는 아홉 편의 소설에는 현재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대체로 비슷한 결을 지닌 인물이 등장한다. 아픈 어머니는 잠시 일을 쉬고 있고, 나는 학원 대신 작은 서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언니는 세상을 떠났고, 돌봐야 할 조카는 아직 어리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 中) 언니가 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지, 왜 돈을 더 벌 수 있는 일을 내 마음이 더는 견디지 못하는지, 구체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는 묘사하지 않는다. 소설은 그저 과정에 놓인 자신의 일상을 수수하게 털어놓는다. 장을 보고 농담을 하며 나아가는 하루하루. "자신 없으면 자신 없다고 말하고 가끔 넘어지면서 살고 싶다"라고, "정말 미안할 때만 미안하다고 말하고 살 것이다"라고 다짐하는 소박한 사람들. 사철나무며 참새를 바라보며 걷는 봄 출근길의 마음을 짐작하며 꼭 소설 속 사람들처럼 어떤 다짐들을 되새기게 된다.
소설가 박상영은 "함부로 무엇을 알고 있다고 단정하지 않고, 한 발짝 물러서서 고통을 그저 바라볼 줄 아는 이주란의 소설을 나는 사랑한다."라고 말하며 이주란의 소설을 추천했다. 세계가 만약 1. 나 자신이 뚱뚱하다고 말할 때 그런 나를 위로하기 위해 "아니라고, 괜찮다고, 팔십 킬로그램은 넘고 이야기하자고" 말하며 저도 모르게 위계를 구분하는 이들과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2. (아마도 세입자일) 각자의 작은 집에 모여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모임을 하는 동안, 집주인이 소음으로 이웃과 고초를 겪지 않도록 "판단해서도 안 되고, 크게 떠들어서도 안 돼요!" (<일상생활>)라고 말하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나는 후자처럼 말하는, 판단하지 않고 크게 떠들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이주란의 소설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주란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의 저자이자, '생선' 작가로 더 많이 불리는 김동영. 무언가를 기대하고 찾기 위해 떠나고 돌아오는 일을 20년 동안 반복해온 그가 오랜만에 여행에세이 <천국이 내려오다>를 펴냈다. 이번 신작은 인도부터 발리, 호주, 일본, 네팔, 미국까지 21개의 나라 31개의 도시에서 만난 '천국' 같은 풍경과 순간들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다.
바라나시의 화장터에서는 시체가 태워지는 걸 직접 목도하며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교토의 야세 마을에서는 청춘 시절의 사랑에 관한 추억을 떠올렸고,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깊은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 발리의 우붓으로 무작정 떠났으며, 10년 만에 네바다주를 관통하는 95번 국도에 서서 10년 후의 미래를 다짐했다. '천국' 같은 시간이자 '치유'의 순간이 되어준 31개의 여행 이야기가 김동영 작가만의 특별한 지도 위에서 다채롭게 펼쳐진다.
"할머니는 인어 봤어요?"
"그럼, 봤지."
"할머니... 나도 인어인데."
수영을 좋아하는 소년 줄리앙은 할머니와 함께 수영장을 다녀오는 길에, 인어 분장을 한 무리를 만난다. 집으로 돌아온 줄리앙은 화분과 커튼으로 인어 분장을 하고, 이를 발견한 할머니는 줄리앙을 데리고 길을 나선다. 광장에는 인어 무리가 행진을 하고 있다. "그래, 우리 꼬마 인어도 같이 가 볼래?" 인어들은 함께 걷는다.
소년의 조금은 특이한 소망과 이를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제시카 러브의 첫 그림책이다. 작가는 스스로를 발견한 이들에게 작은 파티를 열어 주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 책을 지었다고 한다. ‘볼로냐 라가치상 오페라프리마 부문’과 ‘에즈라 잭 키츠 상’의 심사위원단은 각각 “놀랍도록 섬세한 감정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작품.” “짧지만 완벽한 이야기. 누군가의 꿈을 어떻게 지지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작품.”이라 평하며 상을 수여했다.
여행 작가로, 또 육아 멘토로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아 온 오소희의 신작이다. 20년 동안 엄마로 살아온 저자는 '엄마 졸업'을 선언함과 동시에 이땅의 수많은 엄마들의 '삶'을 되찾아 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저자는 '정상이 아닌 엄마'였던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들려준다. 한 개인의 인생 회고 혹은 육아담, 여행담에 불과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 길었던 여정 속에는 남성 중심, 입시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쳤던 고민과 노력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녀가 정상이 아닌 엄마로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오소희 작가는 엄마들이 왜 '나'를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간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이제 이 책의 핵심 주제를 다루는 2부로 넘어갈 차례다. 바로 엄마들이 어떻게 '나'를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그 해결 방안 15가지를 제시한다. 지침들은 실천적이고 구체적이며, 진부하지 않아 더욱 좋다. 자 이제 본질적인 물음을 던져 보자. 이 책은 누구를 위한 책인가. 엄마들? 아니면 예비 엄마들? 혹시, 아빠들이 먼저 읽어야 할 책은 아닐까. 책을 읽고 나니 그 생각이 확고해졌다. 남자로서 말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김초엽을 소개한 한국과학문학상이 장편 부문 수상자 박해울을 독자에게 소개한다. '저급한' 기계인간이 아닌, 완벽한 인간만을 승무원으로 뽑은 초호화 우주크루즈 '오르카호'가 예기치 못한 운석 충돌로 난파되었다. 난파선에서 의사 '기파'가 사고를 수습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지구에서는 기파 평전이 출간되어 그를 오르카호의 성자로 기념한다. 우주택배일을 하는 '충담'은 우연히 오르카호를 발견하고, 우주선 속 기파를 찾으면 상금으로 아픈 딸을 수술할 수 있기에 그의 기척을 간절히 뒤쫓는다. 그렇게 기파의 진실을 따르며 이야기가 질문을 던진다.
'기파'의 발상은 향가 <찬기파랑가>에서 출발한다. 기파랑의 마음 끝은 냇물에, 조약돌에 어린 듯하고, 그가 떠난 자리에 놓인 사람들은 그의 가치를 뒤늦게 쫓는다. 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삶의 격을 높일 수 있을까. 기계 장기로 생체 장기를 대체할 수 있는 고도로 발전된 사회임에도 여전히 소설 속 사회는 생체 장기를 고급스러운 것으로, 기계 장기를 가난의 상징으로 층위를 나눔으로써 차별을 지속한다. 사이보그로 구성한 비공식 승무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길로만 다녀야 하는 초호화 우주크루즈를 상상하며, 사회복지사로 일해온 작가 박해울은 독자에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격에 대해 질문한다. "글은 기술이 아닌 인격으로 쓴다는 걸 보여준 따듯한 작품"이라는 평과 함께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한국과학문학상을 수상했다.
원서의 부제는 "좋은 의도와 나쁜 생각이 만나 어떻게 한 세대를 망치고 있는가"다. 한 세대를 망치고 있다고? 그렇다. 저자인 조너선 하이트와 그레그 루키아노프는 젊은 세대가 망쳐지고 있다며, 그 배경으로 이 세대가 믿고 있는 세 가지 비진실을 말한다. "죽지 않을 만큼 고된 일은 우리를 더 약해지게 한다." "늘 너의 느낌을 믿어라." "삶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사이의 투쟁이다." 고대의 지혜와 대척점에 있는 이 비진실들이 젊은 세대에 널리 퍼져 있다. 그 이유로 두 저자는 '과잉보호'를 꼽는다. 기성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안전을 너무 강조한 결과라는 것이다.
물론 젊은 세대가 처한 위기는 인정한다. 현실은 팍팍하고 미래는 어둡다. 극단주의자들은 계속 생겨나고 진실을 알 수 없는 정보들은 SNS를 통해 필터 없이 들어온다. 그렇지만 격리된 무균실에 들어가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안전주의는 또다른 위험을 만들어낼 뿐이다. 이제 문제를 알았으니 제대로 된 방향을 찾아가야 할 텐데, 이 책은 클래식한 해답들을 제시한다. 젊은 세대들이 안전선 밖의 세상을 접하도록 하는 것, 생각하도록 독려하는 것, 쉬는 시간을 주는 것 등이다. 고전적 진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로 대개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답변을 내놓지만, 이는 위기 상황 앞에서 댈 변명은 아니다. 젊은 세대에 지금 빨간불이 켜진 상태라지 않은가.
<그 겨울의 일주일>의 작가 메이브 빈치가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다채로운 이야기를 풀어냈다. 겨울밤 반짝이는 조명과 벽난로의 온기, 전나무 아래 놓인 선물 상자로 대표되는 크리스마스만의 따뜻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기대와는 전혀 다른 크리스마스를 맞기도 한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그동안 묻어두었던 서운함을 폭발시키고,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로 약속했던 이를 떠나보낸 사람들은 유독 쓸쓸하고 혹독한 겨울과 마주한다. 일년 중 가장 행복해야만 하는 날이라는 괜한 의무감 속에 평소에는 신경쓰지 않았던 외로움과 갈등이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하마터면 망칠 뻔한 크리스마스를 구원하는 것은 극적인 사건이나 엄청난 행운이 아니라 소소한 우연들이다. "결심만 한다면 크리스마스를 구원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결국 '올해는 다른 크리스마스'로 이어지는 모습이 미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서로를 원망하고 용서하고 위로받고 또 마음을 나누며 삶을 공유하는 사연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어 크리스마스의 다채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돌이 깔린 길을 여행하고 있다. 그때 하늘에서 돌을 줍는 사람은 누구든 후회할 것이고 돌을 줍지 않은 사람 역시 후회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떤 이는 돌을 주웠고, 어떤 이는 돌을 줍지 않았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침에 집에 도착했을 때, 주워온 돌은 보석으로 변해있다. 돌을 줍지 않은 사람은 줍지 않은 것을, 돌을 주운 사람은 더 줍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부족한 건 보석일까,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일까.
류시화 시인이 들려주는 100편의 인생 처방 우화. 인도를 여행하며 30년간 채집한 우화와 설화, 신화 등에 류시화의 이야기를 더했다. 현명한 조언자와 어리석은 왕, 성자와 도둑, 인간과 동물이 연이어 등장하며 삶의 어려움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건넨다. 우화 속에서는 반드시 솔직함이 지위를 이기고 겸손이 자만을 이긴다.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이야기 속에서 얻는다.
<간송 전형필> 이래 한국 전기 문학의 신기원을 이루어 온 이충렬 작가가 일곱 번째 전기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조선의 화가이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단원 김홍도의 이야기다. 그의 작품은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지만 그의 삶은 그러지 못했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더욱이 한동안 단원을 깊이 다룬 이렇다 할 책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김홍도가 태어난 곳을 처음 밝혀냈다'는 대서특필이 이어질 법도 하다. 시대와 인간을 그린 화가 김홍도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삶을 살다 갔을까.
김홍도에겐 글보다 그림이 가까웠기 때문일까. 편지 몇 통 외에는 직접 남긴 기록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충렬 작가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그는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부족한 사료를 보완하기 위해 동료 화원들을 불러내고, 학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오류를 바로잡고, 위작을 걸러내고, 음담패설까지 살폈다. 그리하여 복원해 낸 단원의 삶은 함께 수록된 100여 점의 그림처럼 묵직하고 선명하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김홍도를 읽으며 작가 이충렬을 함께 기억하게 하는 이 책은 전기는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라는 작가의 말을 스스로 증명해 낸다.
일상의 틈바구니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공간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간에 얽힌 기억일 것이다. 내게는 씨마크 호텔이 그렇다. 로비에서 나던 깨끗한 향, 파노라마처럼 보이던 통유리창 바깥의 바다, 밤새 들려오던 파도 소리와 폭죽 소리,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면 온통 파랗던 풍경. 좋은 공간은 온몸의 감각을 이다지도 생경하게 만드는구나, 새삼스러웠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대화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인지라 이 책에서 씨마크 호텔에 대한 글을 가장 먼저 펴 읽었다. 눈에 들어온 문장, "여유 있게 바라보는 풍경의 독점은 황제의 권능을 부럽지 않게 해 준다." 내 경험과 공명하는 부분에선 개운하고 미처 몰랐던 정보의 습득은 흐뭇하다.
전작 <심미안 수업>에서 미적 감각을 기르는 방법을 알려준 윤광준 저자가 이번엔 실제로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들을 소개한다. 씨마크 호텔을 비롯해 앤트러사이트, 뮤지엄 산, 오드 메종 등 미학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공간들이다. 감각을 깨울 목적으로 방문할 곳들이 생겼다는 것이 기쁘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모두 국내라는 것이다. 이 책 한 권 챙겨들고 부담 없이 떠나도 좋겠다.
바야흐로 구글의 전성시대다. 그 구글 제국의 한복판에서 저명한 디지털 사상가인 조지 길더가 구글의 종말을 말한다. 일찍이 텔레비전의 종말을 예견했던 노대가인 그의 주장은 단호하고 확신에 차 있어서, '구글의 모든 중요한 전제들이 무너질 것이므로 구글은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이라 말할 정도다. 구글은 누구에 의해, 무엇 때문에 몰락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구글 이후 우리 삶의 양상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지난 20여 년간 구글은 사람들의 삶과 운명을 짊어지겠다는 열망으로 가득찬 어떤 '통합적인 철학'을 개발해 왔다. 그 온갖 편리한 공짜 서비스를 누리는 대가로 우리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구글에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길더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일갈하며, 바로 그러한 공짜 정책이 구글 스스로에게 가장 큰 위험이 될 것이라 진단한다.
길더의 주장에 따르면, 구글은 시간의 한계를 초월해 알고리즘을 가속화함으로써 그 희소성을 속이고 있다. '무료'라는 말에 함축된 무한대에 가까운 수요는 시간의 희소성을 반영하는 유한성과 상충한다는 것. 또 그들이 내세우는 빅데이터는 가히 위협적인데, 인간의 뇌도 본질적으로는 알고리즘적이어서 인공지능이 결국 인간 정신을 넘어설 것이라는 기대가 가능하기 때문이란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그는 구글이 그리는 미래가 이차원적이라 평가절하하며, 우리의 우주가 이차원으로 축소돼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정보이론의 대가 그레고리 차이틴이 남긴 말이 이 책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것은 유동적이며 창의적이다! 정적이며 영원하며 완벽한 수학에서 우리가 어떻게 삶을 건설해나갈 수 있겠는가?"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공부가 있다. 지식과 교양을 쌓기 위해 또는 취미 삼아 하는 공부, 삶의 지혜를 얻어 가는 인생 공부, 그리고 학창시절부터 우리를 옥죄어 온 시험공부 등, 그 종류에 따라 공부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달라진다.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가 있고 해야만 하는 공부도 있다. 시험공부는 명백한 후자다. 시험공부에는 점수 획득 혹은 합격이라는 아주 확실한 목적과 방향이 있다. 그에 부합하는 공부를 해야 함은 물론이다. 요컨대 응시생이라면 시험공부와 공부를 철저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전까지 저자를 피시방으로 이끌었다는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게임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루종일 붙들고 있다 보면 실력이 늘기야 하겠지만, 공략집의 도움을 받으면 진행이 훨씬 수월해진다. 마찬가지로, 시험을 잘 보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저런 공부법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필요하다. 정확하게는 시험을 준비하고 치러 내는 법이 되겠다. 그것은 많은 수험생들이 그 길을 먼저 걸어 성공한 선배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이유며 저자가 선배로서 이 책을 쓴 계기다.
책에는 출제 유형을 익히고 인풋과 아웃풋을 통해 본격적인 학습을 하는 방법은 물론, 동기부여, 교재선정, 계획수립, 그리고 멘탈관리와 막판 시험전략까지 시험공부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공부법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시험 그 이상의 지식에 욕심내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말인즉 마음 단단히 먹고 한 곳만을 똑바로 바라보라는 거다. 당장 준비하는 시험이 없다 해도 새겨들을 필요는 있겠다. 인생의 매 순간이 시험 아니던가.
"그런 것도 물리학인가요?" 김범준 교수가 자주 듣는 질문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내용만 봐도 막연히 물리학 도서에서 다룰 것이라 상상한 내용과는 거리가 있다. '사라진 만취자를 찾는 과학의 방법', '비폭력 저항 운동이 효율적인 이유', '부의 치우침을 줄일 수 있을까' 등 그가 물리학으로 탐구하는 것은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세상이다.
전작 <세상물정의 물리학>을 재미있게 읽었던 독자라면 이번 책 역시 반가울 것이다. 김범준 교수가 '순전히 궁금했기 때문에' 연구한 주제들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흥미롭다. 요지경 세상에서 그가 질서와 원리를 발견해내는 과정을 보면 어쩐지 삶이 조금 더 명쾌해지는 것도 같다. 부록에 쓰여 있는 것처럼 1,000년 뒤에도 남을 의미 있을 질문들을 그가 언제까지고 계속해주길 바란다.
도리스 레싱의 대표작 <금색 공책>이 작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면 개정판으로 독자를 만난다. '페미니즘 문학의 경전'이라 불리며 수십 년간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기도 한 작품이다. 레싱은 출간 후 서문을 추가하며 "성 대결에 관한 소설로 격하"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이 책은 단지 "공격성, 적대감, 원망과 같은 여성의 다양한 감정"을 묘사하고 활자화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많은 여성이 이런 것을 느끼고 경험하고 있었다는 것이 왜 충격으로 다가와야 하느냐고 말이다. 이에 더해 책을 쓰기로 한 이유는 '시대에 대한 하나의 유용한 증언'을 위해서였음을 밝힌다.
소설의 배경은 1950년대 런던, 싱글맘이자 전 공산당원인 작가 애나와 친구 몰리의 이야기다. '자유로운 여자들'이라는 첫 장의 제목은 반어적이다. 두 여성은 '평범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종 "당신네 자유로운 여자들"이라 불리지만, 여전히 다양한 속박과 굴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혼돈 속에서 삶이 무너지는 것을 느낀 애나는 자신의 감정을 여러 공책에 나눠 기록한다. 검은색과 노란색 공책에는 자전적 경험을 녹인 소설을, 빨간색 공책에는 공산당원 시절에 느낀 당의 민낯을, 파란색 공책에는 내밀한 일기와 정신분석 상담 내용을 적는다. 그리고 마지막 금색 공책에서 분열된 자아의 조각들을 하나로 엮어낸다. 소설은 이 공책들의 내용과 애나의 삶을 교차해 보여주고 독자를 그 과정에 동참시킨다.
'무너져내리는 과정'에서 비로소 사람들은 스스로를 떠받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패턴과 공식을 돌파할 수 있다고, 작가는 서문을 통해 말한다. 그렇게 <금색 공책>은 기성의 관념이라는 견고한 벽에 던져져 금을 내는 단단한 돌이 된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20대 초반에 만난 <금색 공책>의 주인공 애나 울프는 내 눈을 뜨게 해주었다"는 고백과 김영란 전 대법관의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책"이라는 추천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독자의 삶에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조금 이르게 2020년을 연다. 현대문학상의 2020년 수상자로 <친애하고, 친애하는> 등의 작품으로 독자를 만난 백수린이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라는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하루 아침에 공사현장으로 전락한 어떤 집을 보고 작가가 휴대전화의 메모장에 적은 문장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에서 이 소설은 시작되었다. 두 아이를 낳고 사실상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는 붉은 지붕집에 대한 어떤 환상이 있다. 젖먹이 아기가 있는 여성의, 유축기를 지참해야 하는 몸이 우연히 마주친 20대 발레리노와의 만남 이후 욕망을 느낄 수 있는 한 여성의 몸으로 환기될 때, 세계가 미세하게 어긋난다. 하루 아침에 무너져버린 이후 다시 지어질 붉은 지붕집이 더 이상 예전의 그 집이 아니듯, '아름다움' 이후의 그녀 역시 더 이상 전과 같은 사람일 수 없다. 백수린의 정돈된 문장이 묘사하는 세계의 아름다움과 착취는 단정해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미세하게 어긋난 삶의 각도를 감지할 줄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읽거나 그런 사람이 더 잘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라고 소설가 이승우가 평했다.
눈에 띄는 작품으로 한 해를 채운 작가들의 신작이 함께 소개된다. 특유의 리듬감을 지닌 속도감 있는 문장이 이어지는 김사과의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 수수하고 절제된 세계를 묘사하는 이주란의 사려 깊은 방식이 드러난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우리가 사는 세계의, 약자가 약자를 재단하는 모양새의 모순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강명의 <대기 발령> 등의 작품 외에도 강화길, 기준영, 김애란, 손보미, 우다영, 최은미, 편혜영의 작품이 함께 실렸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의 '삼삼'한 서른세 편의 시를 지나 김민정이 돌아왔다. 마흔네 살의 겨울, 마흔네 편의 시를 실은 네번째 시집의 화두는 '곡두'이다. 눈앞에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영을 의미하는 말. 핸드백을 정리하다, 택시를 타고, 고추장떡을 부치고 소주를 따르는 찰나 시는 말장난처럼 주절대며 '곡두'를 넘나든다.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거칠고 진솔한 말들. "시에다 씨발을 쓰지 않을 것이고/눈에다 졸라를 쓰지 않을 것"(<1월 1일 일요일>)이라고 다짐하다가도 "구두 밑창에 들러붙은 개똥 떼면서 개씨발거리는 내가 있고"(<나는 뒤끝 짱 있음>) "복수가 별거겠어? 끝끝내 죽어라 살아남는 거지" (<잘 줄은 알고 할 줄은 모르는 어떤 여자에 이르러>) 다짐하며 버틴다.
"웃긴 걸 좋아하는 나. 웃긴 사람을 편애하는 나. 누군가 더럽게 웃긴 년이라 할 때 그 말을 칭찬으로 알아먹는 나."(<이제니가사람된다>)는 와글대며 곡두처럼 스쳐지나가는 삶의 풍경들을 말한다. 자궁암으로 죽기 전까지 나한테 잘못하지 말아요.를 잠꼬대처럼 반복했다는 프리랜서 편집자 언니, 할당량이 주어져 있으므로 닥치는대로 찻잎을 따는 스리랑카 여자의, 잘린 손목이 우르르 쏟아지는 꿈. 발마사지를 하던 몽골 여인이 나 걱정해서 해준 이야기와 별이 쏟아지는 몽골의 밤하늘. 버텨야 하는 삶은 아름답지 않고 "왜 다 태어나서 이 고생일까?"(<시는 안 쓰고 수만 쓰는 시인들>) 외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은 나에게 언어를 주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아픔을 그대로 바라보는 데에서, 한 사람을 '중국의 어느 여성 노동자'가 아닌 '정샤오충'으로(<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넷>) 정확하게 지칭함으로써 그 징글징글한 사랑이라는 것이 이어진다. 가장 큰 사랑 대신 많은 사랑으로 시가 세상을 본다.
양승태 사법 농단. 장마비처럼 쏟아져내린 기사들에선 이렇게 깔끔한 말로 정리되었다. 어떤 현상에 짧은 이름을 붙일 때 우리는 많은 부분을 잊는다.
간결한 기사 뒤, 괄호 안에 숨은 것은 스러져간 인생들의 이야기다. 땅! 법봉이 부딪힐 때,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는 국가 채무자가 되었다. 땅! ktx 여승무원 노조원이 세 살배기 딸을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땅! 빨갱이로 몰린 전교조 소속 교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양승태 사법부는 쓰러진 삶들을 차곡차곡 포개어 밟고 올라섰다.
어떤 책은 경쾌한 앎을 선물함으로써 그 의미를 다 하지만 어떤 책은 읽고 난 뒤 묵직한 요구를 건네온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취재하고 쓴 이 책은 약자들의 삶이 법이라는 이름으로 거래된 이후, 우리가 할 일을 묻는다. 양승태의 유죄가 인정되었으니 그것으로 끝일까? 역사의 한 장을 서둘러 덮고 넘어가려는 이 사회의 손목을 절실하게 붙들고 책이 말한다. 정면으로 수치심을 마주하고 사법 독립에 대한 더 높은 차원의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한다고.
교내 도서실의 도서위원을 맡고 있는 고등학생 마쓰쿠라와 호리카와. 도서위원은 도서 대출, 반납, 서가 정리 등을 담당하는 학생들로, 비어 있는 도서실을 아지트 삼아 수다를 떨거나 게임을 하는 장소로도 활용하고 있다. 도서 당번으로 두 사람이 함께 배정된 어느 날, 한 선배가 도서실을 찾아와 뜬금없는 제의를 한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남긴 금고의 비밀번호를 풀어 달라는 것. 단서는 할아버지의 책장으로, 예전에 두 사람이 함께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에 담긴 암호를 풀어낸 것을 눈여겨본 선배의 특별 부탁이다. 망설임 끝에 이들은 이상한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하는데…
요네자와 호노부가 '고전부'와 '소시민' 시리즈에 이은 또 하나의 청춘 미스터리로 돌아왔다. 의심 많고 주의력이 깊은 마쓰쿠라와 순진하지만 직관이 강한 호리카와.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 각자가 보지 못한 부분을 포착하며 함께 일상 속 미스터리를 풀고 우정을 키워나가는 모습이 입가에 미소를 자아낸다. 시험 기간 교무실 침입 사건, 대출 도서에 끼워진 유서 사건, 함께 머리를 깎으러 간 미용실에서 느낀 수상한 낌새 등을 비롯해 귀여운 탐정 콤비의 활약을 담은 여섯 편의 연작 단편이 담겼다.
명실상부 역사 베스트 '용선생'이 이번에는 재미난 과학 수업을 준비했다.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쉬운 서술과, 생생한 사진과 그림 자료, 챕터별 핵심을 쏙쏙 담아낸 요약 노트와 4컷 만화까지 다양한 구성으로 지루하지 않게 풀어냈다. 다소 어려운 개념들도 생활 속의 사례를 통해 쉽게 설명해준다.
각각의 책은 생태계, 전기, 지구, 힘 등 하나의 키워드에 관한 과학적 개념과 원리를 다루고 있어 흥미로운 분야부터 골라 살펴볼 수 있다. 2019년 최신 과학 교과서를 충실히 반영하여 실제 교과서에 해당 내용이 어떻게 실려있는지도 함께 수록해, 교과 과정에 맞춰 따라갈 수도 있다.
과학 교육 전문가들이 5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만큼 알찬 내용은 물론,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되는 과학의 즐거움도 가득 담겨있다. 분야도, 다뤄야 할 내용도 많은 과학.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면 용선생 시리즈와 함께 해보자. <용선생의 시끌벅적 과학교실> 시리즈는 더욱 다양한 키워드로 계속 출간될 예정이다.
'지대넓얕'이 4년 만에 돌아왔다. 앞선 1, 2편에 이은 이번 3편은 그러나 '제로 편'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다. 제로 편에선 1, 2편에서 다루었던 지식의 이전, 일원론의 시대로 돌아간다. 우주의 탄생, 생명의 탄생, 철학의 탄생을 통해 자아와 세계를 논한다. 이번 책의 부제는 '모든 지식의 시작, 모든 지식의 완성'이다. 시작으로 완성하는 시리즈의 구성마저 '지대넓얕'답다.
누적 판매 200만 부, 인문 교양 최장기 베스트셀러. 신드롬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기록이다. 언제 다음 편이 나오나 기다린 이들이 많을 것이다. 경쾌한 문장으로 넓은 지식을 빠르게 훑는 지대넓얕 특유의 재미는 이번 편에서도 이어진다. 기다린 마음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스물두 마리 고양이들의 일상을 담은 유튜브 채널 '22똥괭이네' 이야기를 이제 책으로 만난다.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던 저자 '이삼 집사'는 어느 날부터 아픈 고양이들을 하나둘 구조하기 시작했다. 그중 입양된 아이도 있지만, 품종묘가 아니란 이유로 입양의 길이 막히거나, 아파서 파양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연 있는 고양이들을 보듬고 또 보듬다 보니, 어느덧 스물두 마리의 대가족이 함께 살게 됐다. 18만 유튜브 구독자들을 웃기고 울린 똥괭이들의 일상 이야기와 사진을 한 권에 가득 담았다.
1부에서는 첫 고양이 콩님이, 눈 오던 날 집고양이가 된 이백이와 고니, 연로한 할배, 아픈 손가락 기적이까지, 각 고양이들의 첫 만남부터 구조 과정과 사연을, 2부에서는 구조 후 집고양이로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상 이야기를 풍성하게 들려준다. 또한, 접하기 어려웠던 비하인드 스토리와 미공개 사진을 최초로 공개한다. Grace J 작가의 사랑스러운 일러스트까지 더해 독자들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주는 따뜻한 포토에세이다.
어지러운 시대, 그라면 어떤 말을 보태었을지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어쩔 수 없이 궁색해지는 삶의 어느 순간에 그라면 어떤 태도를 보였을지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일면식도 없지만 그는 종종 기준점이 된다. 올곧게 닦아놓은 길을 뒤따르고 싶은 사람들이 많기에 그는 스승으로 불린다.
신영복 선생의 4주기를 맞아 그의 삶과 사상을 담은 평전이 출간됐다. 선생을 곁에서 오래 지켜봐 온 두 성공회대 교수가 집필했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한 선생의 말과 글과 생각이 구체적으로 빼곡하다. 어린 신영복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건들을 읽을 땐 마음이 흐뭇하고, 성인이 된 이후의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베푼 일들을 읽을 땐 새삼 그립다. 선생을 이따금씩 떠올리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반가울 선물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단 세 줄의 시로 많은 이들의 마음에 직관적인 감동을 전한 '풀꽃 시인' 나태주의 등단 50주년 기념 신작 시집이 출간되었다. 1부 신작 시 100편, 2부 독자들이 사랑하는 애송 시 49편, 3부 나태주 시인이 사랑하는 시 65편으로 구성해 나태주의 시 세계를 깊이 있게 경험할 수 있게 구성했다.
쓸쓸해져서야
보이는 풍경이 있다
버림받은 마음일 때에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길 1>)
수수한 단어로 이루어진 따뜻하고 사려 깊은 말. 풍성하게 차려놓은 시를 중국 출신의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 오아물 루(Oamul Lu)의 작품과 함께 감상한다. 인생이라는 여행의 긴 여정을 응시하는 담담한 시선과 함께, 따듯하고 아늑한 여행이 비로소 시작된다.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이들에게 용기는 필수 요소다. 감히 회사를 경영하거나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면 말할 것도 없겠다. '감히 이끌다(Dare to Lead)'는 원서 제목을 보고 든 생각이다. 리더가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감히 이끌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일 것이다. 그 마음의 상태를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이 리더의 첫 번째 덕목이자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말하는 이는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이다. '완전한 솔직함'을 강조했던 <실리콘밸리의 팀장들>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녀가 실리콘밸리의 CEO들이 앞다투어 찾는 심리학자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렇다. 이 책은 나의 부족함, 마음의 불안, 그 취약함을 인정하는 용기에 대한 이야기다.
책에는 브라운의 주 연구 분야인 '취약성(vulnerability)'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심리학에서 스트레스 민감성을 뜻하는 용어로 그녀는 이를 '불확실성의 위험과 감정에 노출된 상황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정서'로 정의한다. 그녀는 독자들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취약성에 대한 여러 오해들을 바로잡으며, 주위의 평가로 자신을 규정하지 말고 스스로 그 취약성을 인정함으로써 대담하고 냉정하게 진실됨과 명확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무대를 조직에서 인생으로 바꿔 보면 이는 우리 삶 전반에 적용 가능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경영자나 관리자가 아니어도 이 책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다. 명심하자. 취약성은 약점이 아니며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범죄 소설의 살아 있는 백과사전' 오토 펜즐러가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이은 또 하나의 크리스마스 앤솔로지로 돌아왔다. 원제는 <The Big Book of Christmas Mysteries>로, 작년 이맘때 독자를 만난 <화이트 크리스마스 미스터리>와 이번 <우아한 크리스마스의 죽이는 미스터리>로 나뉘어 출간되었다. 두 권을 합하면 딱 1,000 페이지로 성탄 전야와 이어지는 긴 겨울밤들을 함께하기에 제격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경찰서의 천태만상을 그린 에드 맥베인의 <그날 조사실에서는>, 강아지의 용맹한 활약이 돋보이는 사라 파레츠키의 <세 점박이 포>, 크리스마스 특별 복권을 훔쳐간 범인을 추적하는 메리 히긴스 클라크의 <그게 그 표라니깐요>를 비롯해 무서운 분위기부터 웃긴 분위기까지 다채로운 크리스마스의 맛을 느낄 수 있다. '헷갈리는/현대적인/고전적인/무서운/놀라운 크리스마스 미스터리'로 구분된 다섯 개의 목차 중에 당기는 순서대로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크리스마스 또는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권한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 몇 가지. 하나, 에벌린은 안내견 없이 돌아다니지 못한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키미는 안경만 써도 앞을 볼 수 있다. 놀라운 점은 에벌린과 키미가 동일인의 다른 두 자아라는 것이다. 둘, 크리스는 친척 형으로부터 본인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듣고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때의 감정, 만났던 사람, 그 사람의 생김새까지. 그러나 친척 형이 들려준 이야기는 사실 꾸며낸 것이었다. 셋, 파텔은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아내를 봐도 아내로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들과 감정적으로 분리된 그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위 사례들은 모두 뇌의 어떤 작동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과연 내가 보는 세계는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의심하게 된다. 책에 소개된 사례자들 역시 나와 같이 본인이 보고 믿는 세계가 진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신비한 면들은 뇌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싶게 만든다. 젊은 신경과 의사인 저자는 기이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뇌의 어느 부분이 어떤 작용을 하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흥미롭고도 명료하게 설명한다. 인간 의식과 무의식이 궁금한 모든 이들에게 유익한 탐험이 될 것이다.
뮤지션 이상은의 곡 '넌 아름다워' 노랫말에 서평화 작가의 일러스트가 더해져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그림책. 조금 느리더라도, 완벽하지 않더라도, 이미 '너'라는 존재 자체가 아름답다는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넌 아름다워" "넌 하나뿐이야" "너 하나만을 위한 길이 있어" 반복되는 노랫말들을 곱씹다 보면, 너무 당연해서 나의 소중함을 잊고 있던 건 아닌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렇게 쉬운 말을 왜 지금껏 스스로에게 해주지 못했는지. 노래를 들으며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어떤 것에도 지지 않고 단단하게 마음을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마음속 깊이 스며든다.
서평화 작가가 그려낸 장면들 속에도 행복이 가득 숨겨져 있다. 폭신한 스웨터, 창문에 스치는 바람, 곁에 누워 잠든 고양이, 애플 소다 마시는 밤. 이 모든 사소하지만 거대한 행복들(좋아하는 옷을 입고, 좋아하는 것을 먹고, 좋아하는 시간과 계절을 즐기는 일들)을 그림 속에서도, 일상 속에서도 더 많이 찾아내보자. 우리는 모두 당연히 아름답고, 마땅히 행복해야 할 존재들이니까.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한 해의 목표를 세워야 할 시간이다. 결심은 창대했지만 결과가 미약했다면 자신의 습관을 점검하고 가다듬어 보는 것도 좋겠다. 때마침 우리가 만나 볼 습관 전도사는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웬디 우드다. 30여 년간 인간 행동의 근원을 탐구해 온 저자는 특히 뇌과학과 심리학을 통해 습관의 형성 원리와 작동 방식을 규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21세기 들어 '습관'이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가 늘었는데 이는 뇌과학의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고 분석한다. 뇌의 거의 모든 활동을 시각화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제 우리는 습관을 더 깊게 들여다보고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웬디 우드 교수의 첫 책으로, 그동안의 연구를 집대성하여 습관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그녀는 습관은 우리의 의식적 자아 밖에서 기능하며, 그 영역은 생각보다 훨씬 넓다고 강조한다. 우리 삶과 행동의 43%가 무의식의 영역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나쁜 습관도 포함됨은 물론이다. 그러니 습관의 메커니즘을 알고 좋은 습관이 형성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을 습관화하면 우리는 인생의 다른 기회와 위기에 훨씬 능동적이고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니 이제 노력이 필요 없는 자동화 영역을 이용하여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하자.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들을 위해 말이다.
2010년 장르소설 월간지 '판타스틱'을 통해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정세랑이 10년간 쓴 SF 소설로 첫 소설집을 엮었다. 초기작인 2010년 경의 작품부터 최신작인 2019년 작품까지, 차곡차곡 써내려간 개성적인 이야기가 정세랑이라는 세계를 형성한다. "용 같은 것 말고, 좀더 부적절한 이야기를 써야지. 모두 입을 모아 부적절하다고 말할 만한 이야기를." (<덧니가 보고 싶어> 中) 쓰고 싶어했을 젊은 소설가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색이 선명하고 결이 바른 이야기를 독자에게 꾸준히 선보여 왔다.
손가락이 자꾸 사라지는 미싱 핑거와 시무룩해지는 그를 귀여워하는 점핑걸 이야기.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 멸망과 멸종이 다가오는 시점, 거대한 지렁이들이 '역겨운' 인류 문명을 갈아 엎는 이야기. (<리셋>) 자신의 목소리가 살인자들을 자극하기 때문에 '수용소'에 갇히게 된 승균이 목소리보다 소중한 마음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 (<목소리를 드릴게요>) 마음결을 섬세하게 바라보는 이야기의 개성도 좋지만, 이 이야기들이 향하는 방향의 곧음 역시 와닿는다. '노인이나 외국인이나 여하튼 특정한 사람을 싫어했으면' 벌어졌을 혐오를 염려하는 '가치관이 건전'한 수용자나 (<목소리를 드릴게요>) 여성 양궁 메달리스트인 정윤의 팔의 모양을 보고 '팔이 아니라 조각 같아요'라고 감탄하던 '승훈' 같은 이들.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멸망을 앞두고 "우리가 다른 모든 종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하기 전에 와줬다는 게 감사할 정도다." (<리셋>)이라고 생각하는 인물들의 편에 함께 서고 싶어하는 마음이 이야기 속에 있다. "세계는 더디게 더 많은 존재들을 존엄과 존중의 테두리 안에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는다."는 작가의 말대로, 너무 늦지 않은 때에 도착한 이 이야기들이 우리의 세상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피아니스트가 되어 유럽 순회 공연 중인 엘리오. 그를 만나기 위해 로마행 기차에 오른 아버지 새뮤얼은 우연히 앞자리에 앉은 미란다와 말을 튼다. 대화는 그칠 줄 모르고 로마에서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이혼 후 황량했던 일상에 마법 같은 변화를 맞은 새뮤얼은 이 모든 로맨스가 '늙은 남자의 환상'이 아닐까 경계하지만, 미란다의 눈에 비치는 그는 새뮤얼이라는 한 사람, 그 자체일 뿐이다. 새뮤얼은 되뇐다. '너를 알기 전까지 내 인생의 모든 것은 단순한 서막'이었다고.
파리에 살고 있는 엘리오는 한 성당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예상치 못한 인연을 만난다. 자꾸만 올리버를 떠올리게 하는 미셸. 서로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 때, 엘리오는 10년이 지났지만 단 한번도 잊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고백한다. 한편 결혼 후 뉴욕의 대학에서 교수가 된 올리버는 다른 도시로의 전근을 앞두고 있다. 송별 파티에서 누군가 연주한 바흐의 피아노 선율에 올리버는 멍해진다. 피아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떠올렸던 한 사람. 오래 전에 그를 위해 그 곡을 연주해 준 한 사람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도 떠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더는 자신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란 믿음을 버린 이들이 다시 장벽을 허물고 사랑할 수 있기까지. '정리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건 사후세계나 남겨진 사람들의 몫일 테니까. 궁극적으로 내 삶의 장부를 마무리하는 건 내가 아니라 삶이니까', 눈앞의 사랑을 놓치지 말고 지금의 생을 충만하게 살아가라고 소설은 말한다. '템포-카덴차-카프리치오-다 카포', 음악 용어로 된 제목을 타고 흐르며 교차하는 세 사람의 사연. 처음으로 돌아가 악곡을 되풀이하여 연주하라는 마지막 장의 이름 '다 카포'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
현직 국어 선생님들이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문학 작품들을 꼼꼼히 검토해 주제별로 엮어낸 책. '공감', '성장', '상상', '자존감', '연민' 총 5가지의 주제로, 우리나라 근현대 문학부터 고전 문학, 외국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다룬다. 소설, 시, 수필 등 갈래별로 묶여있던 기존 문학 읽기 책과 달리, 한 권의 책에서 여러 갈래의 작품을 함께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내가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주인공과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자신의 삶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을 제시해 직접 느끼고 공감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구체적으로 답을 하지 않더라도, 이를 고민해보는 것 자체로 작품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해설 부분 역시 딱딱한 서술은 피하고,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듯 대화체로 풀어내 쉽게 읽힌다.
2019년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뽑힌 타라 웨스트오버. 그녀의 특별한 회고록 <배움의 발견>은 2018년 출간 직후 미국 출판계를 장악하며 각종 미디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고, 『뉴욕타임스』 최장기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공교육을 거부하는 아버지로 인해 16년간 학교에 다니지 못한 그녀가 어떻게 케임브리지 박사가 되었을까? <배움의 발견>에서 그녀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는 모르몬교 광신도 아버지, 아버지의 폭력성을 방관하고 동종요법을 맹신하는 어머니, 여성에게 신체적.언어적 폭력을 서슴없이 가하는 오빠. 그런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타라 웨스트오버는 기본적인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은 물론, 병원 진료조차 받지 못한 채 유년 시절을 보냈다. 열여섯 살이 되어서야 대입자격시험(ACT)에 필요한 과목들을 독학으로 공부하여 대학에 합격했다. 그 후 게이츠 케임브리지 장학금 수상자로 지정되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몇 년 후 동대학에서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배움의 발견>은 16년간 외부와 단절된 상태로 아버지가 구축한 세계 안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던 소녀가 교육의 기회를 스스로 쟁취하여 눈을 떠가는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세상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창녀'가 하는 짓이라며 비난하는 아버지, 가정 안에서의 은밀한 폭력 등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배움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그녀에게 배움은 학업적 성취를 넘어 세상을 넓고 깊게 바라보는 일이며, 더 나아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해가는 일이었다. 배움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와 폭력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 것이다. 아이다호의 벅스피크와 케임브리지를 넘나들며 소설처럼 펼쳐지는 한 여성의 성장기가 경이롭게 펼쳐진다.
작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내년엔 전 세계인의 생필품이 되고, 어제까지의 선망의 대상이 내일은 무용지물이 되는 세상이다. 기술의 발전은 자꾸만 인류를 따돌린다. 오종우 교수는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낼 원동력으로 예술적 상상력을 말한다.
예술적 상상력은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초월하는 시대에 남은 '인간다움'이다. 상상은 사유를 넓히고 세계를 확장한다. 오종우 교수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로 인간 사유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그는 인상주의의 작품들로 미래를 여는 상상력을 설명하고, 클레의 <관조>로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힘을 말한다.
5년 만에 돌아온 그의 예술 특강은 더 예리해졌다. 이 책은 혼란한 우리가 삶을 붙들기 위해 길러나가야 하는 힘이 무엇인지 명확히 가리킨다.
독살을 두려워한 히틀러는 모든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여부를 미리 감별하게 했다. 이 임무를 수행할 자에겐 두 가지 자격이 필요했다. 히틀러의 비밀 벙커가 있는 국경 마을에 거주하고 있을 것, 그리고 건강한 순수 아리아족 여성이어야 할 것. 이 조건에 맞춰 무작위로 선정된 15명의 여성은 강제 동원되어 매일 집과 병영을, 삶과 죽음 사이를 통근해야 했다. 스물여섯의 로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임무를 거부해도 죽고, 임무를 수행하다 독이 든 음식을 먹어도 죽고, 운좋게 살아남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 나치에 부역했다는 불명예를 평생 지녀야 한다. 이 모순 속에서 로자는 시식가 일을 '선택'한다.
로자의 세계에선 모든 것이 모순덩어리다.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콜리플라워 향이 가득한" 식탁에 독이 도사리고 있다. 로자의 어머니는 '음식을 먹는 행위는 죽음에 대항하는 것'이라 했지만, 먹는 행위는 죽음의 행위가 되었다. 한편 히틀러의 식사는 채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가축을 도축하는 것이 너무 잔인한 행위"라며 그가 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자는 회상한다. "확실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전복되는 절단된 시대"이자 "생존본능조차 망가진 그런 시대"였다고.
실제 히틀러의 '시식가'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마고 뵐크는 96세의 나이에 평생 비밀로 간직해오던 나치의 만행을 독일의 한 언론에 폭로했다. 이 증언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은 작가는 이를 소재로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대표 문학상인 캄피엘로 비평가상을 수상한 이 소설은 인간이 만들어낸 암흑의 시대와, 그 심연에서도 끝내 싹트는 인간 사이의 연대와 애정을 생생히 드러낸다. 현실에 적응하고 생존하려 애쓸수록 인간성이 마모되는 것을 느끼는 로자는 비인간적인 시대와 닮은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는 죄책감을 놓지 못한다. 단지 생존하는 것조차 죄가 되는 광기의 시대에 인간은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을까. 소설이 묻는다.
라디오 피디인 혜서는 전임자인 진혁이 남긴 방송에서 희미한 소리를 발견하고, 그 소리를 따라 암스테르담으로 향한다. 그 신호는 교통사고로 엄마와 아이를 함께 잃은 애영에게 닿는다. 아이를 임신한 후 남자친구에게 외면당한 뒤 암스테르담으로 떠나 그곳에서 미술을 시작한 애영은 잘못된 지도로 인해 벌어진 교통사고로 가족을, 전부를 잃었다. 두 사람의 궤적이 좌표의 한 지점에서 교차하는 순간, 서로의 여정이 비로소 맞닿는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 천명관의 <고래> 등을 소개한 문학동네소설상의 제 25회 수상작. 사고가 난 자리에 추모를 위해 애영이 놓아두었던 곰인형의 이미지처럼, 적절한 자리에 놓여야 할 적절한 태도에 대해 묻는다. '최단경로'가 항상 '최적'일 수는 없다는 것, 누구의 잘못도 아닌 상실도 있을 수 있다는 모순에 대해 이야기한다. 강희영 첫 장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