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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에세이

이름:성석제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0년, 대한민국 경상북도 상주

직업:소설가

데뷔작
1994년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최근작
2024년 4월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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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처음 이 책에 들어간 글을 쓸 때는 내가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사실 지금도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 꿈인가 하고 놀다보니 소식이 온 것처럼.

낯선 길에 묻다

1986년, 20대 후반에 시인으로 데뷔하고 나서 약 6년 동안 백여 편의 시를 쓰고 발표했다. 1991년에 첫 시집 『낯선 길에 묻다』를 내고 1997년에 두번째 시집 『검은 암소의 천국』을 출간했다. 2020년이 가기 전에 두 시집을 추려 하나로 묶는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단어와 문장이 나를 통과해갔지만 다시 생각하여도 시를 쓰고 있을 때의 나를 부러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가급적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으나 지나치게 헐거운 것, 터진 것은 버리고 메우고 기웠으며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약간은 바꾸었다. 이 또한 인지상정이라 여겨주기 바란다. 실로 오랜만에 시를 매만지면서 부러움과 부끄러움 사이의 내밀한 열락을 맛보았다. 도움을 주신 많은 분께 감사한다. - 개정판 시인의 말

내 고운 벗님

소설을 쓸 때마다 저 스스로가 농부의 자식임을 깨닫습니다. 겨우내 들꿩처럼 엎드려 있다가 때가 되면 글밭을 갈고 글의 삼씨를 뿌리며 김을 매기도 합니다. 해 뜨고 나가고 해지면 들어오는 생활이 반복되는 중에 무엇을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사는 곳 근처에 조물造物의 주화가 있는데 어쩌다 그에 편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언제부터 농부의 피가 흐르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증조께서 삼태기 하나를 지고 명모호치의 어린 증조모 손을 잡고 제금 나신 때부터였을까요. 증조께서 평생을 붙이고 사셨던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데 소설을 쓰는 일은 온통 거짓과 소문을 퍼뜨리는 게 일인 고로 저는 제대로 짓는 것도 없이 탈은 많은 '다방 농사꾼'일지도 모릅니다. (수상소감 중에서)

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

누구에게나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 기회는 대체로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준다. 그러니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벗, 이웃이 금쪽같이 소중하다!

도망자 이치도 (순정)

나는 이 소설에서, 내가 듣고 보고 겪었으며 앓고 갈무리한 현실의 순수한 재현보다는, 순정한 가짜를 선택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면,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 소설은 순진할 척 하는 나쁜 소설이다. 영리하고 바쁜 도둑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한숨 돌리기를 바란다.

믜리도 괴리도 업시

인간은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랑의 산물이고 사랑을 연료로 작동하는 사랑의 기계이다. 살아가는 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내 인생은 순간(瞬間)이라는 돌로 쌓은 성벽이다. 어느 순간은 노다지처럼 귀하고 어느 벽돌은 없는 것으로 하고 싶고 잊어버리고도 싶지만 엄연히 내 인생의 한 순간이다. 나는 안다. 모든 순간이 번쩍거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겠다. 인생의 황홀한 어느 한 순간은 인생을 여는 열쇠구멍 같은 것이지만 인생 그 자체는 아님을.

성석제가 찾은 맛있는 문장들

문장에는 아름답고 슬프고 즐겁고 힘찬, 인생 희로애락애오욕의 모든 특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 문장이 냇물과 도랑을 따라 흘러갈 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냇가를 따라 달리셔도 좋고 도랑에 발을 담그셔도 좋습니다. 문장으로 푸르러진 마음의 풀밭에 누워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시든가요. 저수지의 물로 세수를 하고 둑 위에 서서 얼굴에 묻은 물을 바람에 말리던 때를 떠올립니다. 수문 반대편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에 바람이 집을 짓던 것처럼 모든 문장은 자연스럽게 제자리에 깃들이는 법이니 이 자연스러움에 흔연히 함께해주시기를.

소풍

이 책에 든 글들은 대체로 음식에 관한 것이지만 음식만 이야기하려 한 것은 아니다. 음식을 통해서 새삼 깨닫게 되는 사람과 세상에 관해 썼다. 소풍 가서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고(食) 샘물을 마시는(飮)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낌(感)이 움직이는(動) 것을 공유하고 싶었다. 음식을 먹는 것이 소풍이라면 음식이야기 역시 소풍이며, 무릇 이야기란 또한 우리 삶의 소풍과 같은 것이다. 알게모르게 언제나 소풍을 갈 수 있게 준비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린다. 함께 음식을 먹고 이야기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삶에 감사한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내고 난 뒤 2, 3년의 세월 동안 잘 놀았다는 느낌인데 어느새 새로 창작집을 내게 되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중단편 소설들은 잘 논 시간의 소산인 셈이다. 그런데 교정을 보기 위해 다시 읽어보다 보니 정말 제대로 잘 놀았는지 더럭 의심스러워졌다. 가령 산에 가서 논다 할 때 아래쪽 풍광 좋고 물 좋은 계곡에서 마시고 노래하며 노는 것도 있고 산 위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면서 노닐 수도 있고 사력을 다해 정상을 정복하는 것도 있으며, 정상에 미치지 못하고 지쳐떨어지며 노는 방법도 있다. 각자 취향에 맞게 놀면 될 일이다. 나는 정상보다는 정상 바로 바로 아래쪽 구할쯤 되는 곳을 목표로 마음과 몸에 알맞고 흡족할 때까지 가는 쪽인데 문제는 여기에 들어 있는 소설들이 백퍼센트 내 몸과 마음에 알맞고 흡족하게 맞아떨어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랴, 여기에도 '구할의 원칙'이 있는 것을. 그리하여 내가 소설을 쓰면서도 어떤 구할의 수긍할 수밖에 없는 구할의 묘한 구할(정상×0.9×...×0.9)로 연속되는 어떤 궤적을 따라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구할의 행진 끝에 마지막 결과가 처음 출발할 당시의 모습을 잃을 정도로 순도가 낮아진다면 그 길은 끝날 것이다. 이것이 인생인가? 그런 걸까?

왕은 안녕하시다 1

역사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역사의 흐름을 바꾸거나 역사 그 자체가 된 무명 또는 익명의 존재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써보려고 한 건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오래되었다. 악습을 무너뜨리고 불합리한 체제에 균열을 낸 그들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 스스로의 유전자를 후손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후손이 바로 현재의 우리 자신이다. 결국 이 소설은 나, 또는 우리 조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왕은 안녕하시다 2

역사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역사의 흐름을 바꾸거나 역사 그 자체가 된 무명 또는 익명의 존재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써보려고 한 건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오래되었다. 악습을 무너뜨리고 불합리한 체제에 균열을 낸 그들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 스스로의 유전자를 후손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후손이 바로 현재의 우리 자신이다. 결국 이 소설은 나, 또는 우리 조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왕을 찾아서

15년 전,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다니던 길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 길의 빛깔은 지금보다 훨씬 선명했다. 그대로 남아 있는 길은 얼마나 될까. 세상의 겉모습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달라졌다. 풍속과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그동안 흘러간 광음이 남기고 간 유일한 위안이며 이 소설을 다시 세상에 펴내놓는 가장 큰 이유이다. 2010년 장미의 달, 모락산 아래에서

위풍당당

어린 시절 밥상을 덮던 식탁보는 모자이크처럼 여러 가지 색깔의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식탁보를 들추면 밥과 반찬이 다양한 재료, 시간과 조리방식을 품은 채 한자리에 모여 있곤 했다. 그걸 나눠먹는 사람들을 ‘식구’라고 했다. 밥을 잘 먹고 난 뒤 소화를 시키려고 그러는지 식구들끼리 서로를 가리키며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 손가락질과 놀림이 돌림노래처럼 돌고 돌다 나를 향하고 기정사실로 굳어질 듯한 순간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거 재미있겠네, 지금보다는.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시간과 우연, 고통과 기쁨의 실과 바늘에 엮여 모자이크와 같은 삶을 이루는 소설을 생각해온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또 그런 삶이 여럿 모여 하나의 모자이크를 이룬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들을 가족으로 묶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이 소설은 주어진 운명으로서의 식구가 아닌, 자신이 선택해서 한 식구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외부의 부당한 간섭과 편견에 맞서 싸우며 가까이서 부대끼다 어느 결에 서로의 세포가 닿고 혈액이 섞이며 연리지처럼 한 몸이 된 사람들, 그들에게 강 같은 평화가 함께하기를. 2012년 봄

이 인간이 정말

이 책에 묶인 소설들은 격렬한 기후 변화와 세계화의 와중에 씌어졌다. 그만큼 울퉁불퉁해진 세상에서 균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기억으로 돌아갔다. 고향과 어린 시절처럼 오래된 기억은 천억 개가 넘는 뇌세포 가운데서도 안쪽 깊숙한 데 숨어 있었다. 거기에 언제든 갈 수 있다면 아직은 견딜 만한 것이다. 오늘이 어제의 기억으로 지탱되듯이 현재를 기억함으로써 미래가 생성된다. 잊지 말지니, 기억의 검과 방패로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함께 기쁨을 누리리라는 기약을. 그러니 아직 견딜 만은 한 것이다. 2013년 뜨거운 여름, 망원에서 한강을 보며

인간의 힘

소설 안팎의 두 인물이 일관하여 지키려 한 가치, 나는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를 '인간의 힘'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의 소중함이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 이 책을 신념을 지키기 위해 아무런 말[言]도 없이, 누가 빌려준 말[馬]도 없이 걷고 있을 이들에게 바친다.

재미나는 인생

처음부터 소설의 형식이라거나 생김새에 관해 가타부타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소설이 관용의 폭이 아주 넓은 장르라는 것,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그 안에서 어슬렁거릴 수 있었다는 것은 말해두고 싶다. 다시 생각해보면 문학이, 인생이 모두 그렇다. 무엇이든 내가 새로 시작하려 하면 그 무엇은 드넓은 품을 벌려 나를 받아들여주었다. <재미난 인생>의 초판은 관용의 산물이었다. 이 개정판에는 <재미나는 인생> 이후 출간된 <쏘가리>의 '이야기'를 보태고 지나치게 소설적 관용에 의존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물론 지금의 판단으로) 빼거나 줄였다. 언젠가는 나갔던 것들이 다시 들어올 수도 있겠고 또 지금 있는 것들 중에서도 나갈 게 있을지도 모른다. 또 내가 잘 모르거나 빠뜨린 그 무엇이 들어오고 싶어한다면 들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에 확고한 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소설 밖에서 확고한 걸 찾으라면 삼라만상과 그 얼과 틀은 항상 바뀐다는 것이다.

조동관 약전(略傳)

원래 이 책은 내가 소설가로 길에 나선 이래 두번째로 묶은 창작집이었다. 제목은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 출간은 1997년 6월이다. 무슨 연유인지 작가의 말, 후기, 서문 같은 췌사가 없다. 다시 펴내는 참에 책 속의 소설들을 되새겨 읽어보고 새삼 없어도 될 말을 보태게 되었다. 소설은 김장철에 장바닥에 버려지는 배추의 맨 바깥쪽 잎처럼 시퍼렇다. 뻗세고 시끄럽기도 하다. 하긴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니 어른의 입맛에 맞도록 제대로 묵었을 리 없으리라. 소설을 읽는 동안 상대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회전이 걸린 공을 받아넘겨야 하는 아마추어 탁구선수의 편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한때 그 선수가 나였던가. 어떻든 이 공은 받아넘겨야 한다. 어찌어찌 받아넘긴다 해도 상대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수비 일변도의 선수와 나는 한편이다. 나와 내 그림자의 복식 경기? 아니면 몇 년 전의 나와 그 연장자인 지금 나의 듀엣? 그럴지도 모른다. 내 편이 아무리 약하다 해도 나는 그를 포기할 수 없다. 애처롭고 안쓰럽다. 나는 그를 껴안으며 나를 안심시킨다. 그런데 사납게 공을 넘겨오는 저 상대는 누구인가. 혼자인가, 여럿인가. 옛날식으로 그저 金城鐵壁인가, 더 옛날식으로 지나간 나의 미래인가, 그대들. 그저 봄볕이 좋다. 초봄의 고갱이여, 더욱 여리고 싱싱하구나.

즐겁게 춤을 추다가

70년대여, 80년대여, 나의 30대여. 즐겁게 춤을 추고 있기를, 그곳에서 영원히. 언젠가는 알게 되기를, 꿈결같이 시절과 사람이 오가는 동안 삶은 갱신됨을, 삶에는 구각도 신체도 없음을, 나의 인생아.

지금 행복해

언젠가 '왔다 갔다 하는 게 인생'이라는 어느 현인의 말을 소설로 옮긴 적이 있다. 지금 와서 보니 가기 시작하면서 쓰기 시작하고 가서 쓰고 와서 쓰는 게 소설 같다. 가고 오는 동안은 소설이 육화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쓰면서 참 잘 돌아다녔다. 오고 가고 오가고 가고 가고 가고 가고 가고 오고 가고 또 가고 오고. 내가 갔던 모든 장소가 꽃처럼 피어나 있기를, 내 발자국을 받아준 곳마다 우물처럼 깊어지기를, 내밀한 역사를 내 소설에 내어준 존재들이 내내 안녕하기를. ('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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