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학부생에게 기초 물리학을 강의했는데, 워낙 독창적인 내용이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학부생의 수강은 줄어드는 반면 대학원생과 교수의 청강이 늘어났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 강의록을 책으로 엮은 일명 ‘빨간 책’은 내용도 어려울뿐더러 시장성도 의문시되어 국내 출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오랫동안 간주되었다. 하지만 수학 강사 출신의 한승기 대표가 그 번역서를 내려는 열망으로 무작정 출판에 뛰어들었고, 그렇게 생겨난 승산출판사는 이 책을 비롯해 숱한 교양 과학 서적을 내놓으며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아직도 출판계에서는 한 사람의 고집이 큰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보여준 또 다른 사례라 할 만하다.
서적 분야에서 한국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라면 누구나 먼저 떠올리는 것이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지만, 정작 거기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팔만대장경의 한글화 사업인 ‘한글대장경’ 간행은 1965년에 시작되어 36년 뒤인 2002년에 전319권으로 마무리되었으니, 무려 두 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초대형 출판 사업이었다. 인터넷 시대인 지금은 전자책 형태로 이식되어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시작과 마무리는 종이책이었음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한글대장경’ 첫 권으로 간행된 이래 반세기 뒤인 지금까지도 판매 중인 <장아함경 1>을 선정해 본다.
장르 소설 독자라면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책을 얻기 위해 차라리 출판사라도 차리고 싶다고 생각해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한때나마 그 생각을 실천한 용자도 있었으니, 바로 불새 출판사의 안태민 대표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그것도 중도에 한 번 폐업을 결정했다 번복하는 우여곡절 끝에) 불새에서 간행했다 절판된 SF 소설 17권과 논픽션 1권은 현재 희귀본 대접을 받는다. 21세기의 첫 사반세기 출판계를 이야기할 때에 꼭 들어가야 할 흥미로운 사례들 (예를 들어 도서정가제, 반값도서, 리커버도서, 북펀드, 초판 복각본, 올재클래식스와 염가본 유행 등) 가운데 하나로서, 누군가 한 명쯤은 기억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마지막으로 꼽아본다.
출판기획가 및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저작권센터KCC에서 에이전트로 일했으며, ‘책에 대한 책’ 시리즈를 기획하기도 했다. 우리말로 옮긴 책으로는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신화와 인생》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 《지식의 역사》 《끝없는 탐구》 《빌 브라이슨 언어의 탄생》 《물이 몰려온다》 《신화의 시대》 등이 있다.